식어버린 김칫국
출판사에서 답장이 바로 오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먼저 사람이 아닌 기계가 보내는 자동 답장. '원고 잘 받았습니다. 출간 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연락이 없으면 반려로 이해 바랍니다.' 핵심은 <출간 시>. 얼마 지나도 따로 소식이 없으면 더 이상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 다른 신속 답장은 '저희가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간이 어렵습니다.' 나름 열심히 찾아보고 고른다고 골라서 보냈는데 출판사의 영역과 다르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해당 출판사를 둘러보면 유사 분야의 기존 출판 책이 분명히 있다.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 하릴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혹시 내가 모르는 과거의 안 좋은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니. 출판사에서 처음 받는 답장에 떨리던 흥분은 곧 식어버렸다. 누군가는 몇 시간 만에도, 하루 만에도 긍정적인 연락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런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은 나쁘지 않았다. 정확한 답을 알기 전까지 마음껏 김칫국을 퍼마실 수 있었다. 별 희한한 상상을 다 했다. 내 원고를 보고 출판사 안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상확극을 짜며.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신나게 읽으며 내뱉는 감탄사가 귓가에 들렸다. "오! 이거 좋은데?" "그렇지? 난 벌써 다 읽음!" "이거 우리 팀에서 낼게, 찜!" 공상 속에서 헤매면 괜히 온몸이 떨리고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하지도 않는 몽상의 나래를 펼 정도로 기다리는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가진 걸 다 떠나보내고 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꽉 막힌 답답함과 기약 없는 초조함에 날짜를 더듬을 뿐이었다.
'그때가 좋았구나'라고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시작된 거절 릴레이는 그동안 마신 김칫국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버렸다.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듣고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각양각색의 이유가 현란하게 메일을 물들였다. '출판계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내가 입사할 때부터 우리 회사도 매년 위기라고 했는데 여기도 똑같구나. 아니면 혹시 내 책을 내면 위기가 올 것 같다는 말인가? '출간 여력이 없습니다.' 아무도 모를 책 말고 정말 잘 팔리는 책만 내야 한다는 말씀. '이미 출간 계획이 잡혀있습니다.' 내 책을 내줄 틈 따위 없음. '단행본은 출판사가 원고 청탁한 경우만 진행합니다.' 그걸 왜 이제야 설명해주는 걸까. 설마 내 원고 투고 때문에 내부 방침이 변경된 건 아니겠지? '출간은 어렵겠습니다. 아빠 육아 파이팅!' 아주 안 읽고 답변한 것은 아닌 모양이네. 철벽 수비에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을 때쯤 교묘한 상술이 파고들었다.
들어는 보았는가? 자비 출판. 쉽게 말해서 책 내고 싶으면 자기 돈 투자해서 내라는 뜻이다. 출판사는 투자금에 대한 위험을 덜어서 좋고, 책 내고 싶은 사람은 쉽게 내서 좋다. 출판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비 출판 전문 회사가 꽤 많았고 걸러내기 힘들었다. 일반 출판사와 구분하려면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비슷해 보였다. 자비 출판이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럴 바엔 내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자비 출판을 유도하는 답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귀한 원고가 정말 좋습니다. 자비 출판은 어떠신지요?' 진짜 좋다면 기획 출판을 안 할 이유가 없다. 기획 출판은 흔히 아는 출판사 중심으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대놓고 친절하게 금액을 알려주는 곳도 있었고, 저자가 몇백 부를 먼저 사야 된다고 돌려 말하는 곳도 있었다. 조금 다른 식의 마케팅 방법도 있었다. '원고가 괜찮은 데 저희랑 조금 다듬어보면 어떨까요?' 거절의 늪에서 구명조끼라도 만난 듯 솔깃해졌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다듬는데'도 돈이 꽤 많이 들어간다고 했다. 결국 '내 돈 내고 책 내라'와 똑같았다.
<출판 형식>
- 기획 출판 : 출판사가 중심이 되어 출판 (내 돈 안 냄)
- 반 기획 출판 or 공동 기획출판 : 출판사와 내가 비용 분담
- 자비 출판 : 내 돈으로 기존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출판
- 독립 출판 : 기존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 출판의 모든 과정을 준비
*명색이 출간 도전기인데 뭐라도 좀 정보 같은 게 들어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마셨던 김칫국은 모두 식어 빠져 버렸다. 차라리 아예 묵묵부답인 출판사가 더 친절해 보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확실한 거절보다는 말이 없는 게 나았다. 선고받기 전까진 '혹시'를 남길 수 있으니. 출판사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작가 꿈나무의 투고한 정성과 성의를 알기에 귀한 답장을 보내줬다. 적나라하게 '네 글이 우리는 마음에 안 들어'라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 가끔 친절하게 긍정 내용을 포함해서 보내주는 곳도 있다. 참신하다는 둥 매력적이라는 둥. 물론 사실이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도 잘 안다. 형식상 정해진 멘트라도 거절에 지쳐있는 내겐 괜스레 힘이 된다.
여기까지가 쓰라린 투고의 첫 경험이다. 경험담을 쌓아 담는 중에도 한 곳은 나타나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여전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출판사의 답장이 반갑지 않다. 오히려 무섭고 두렵고 피하고 싶어진다. 뻔히 보여서 기대가 전혀 없다. 이메일 앞머리만 봐도 뒤가 술술 나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힘이 나지 않는 나날이다.
하지만 출간 도전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게 신의 한 수였다. 혼자 방구석에 박혀서 몰래 몇 군데 보내보고 퇴짜 맞았더라면 '에이, 그럼 그렇지'라며 그만두었을 게 분명하다. 책을 내는 순간까지 해보기로 스스로 약속했고 밖으로 내보였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모르는 출판사가 남아있었다. 천천히 차근차근 추가 투고를 진행했다.
많은 응원과 기대, 다음 편 독촉까지. 보내준 뜨거운 마음에 감사하다. 쓰고 난 이후 이렇게나 많은 관심은 처음이다. 그동안 혼자 좋아서 매일 써오다가 처음으로 누군가 기다린다는 설렘을 느꼈다. 이번엔 바라고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미 경험한 분은 예상했을 수도 있겠고. '내 책을 낸다는 것'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다. 출간 도전기의 다음 글을 언제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지금처럼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기다릴 뿐이다. 하나의 글이 나오겠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달려오겠다. 처음의 부탁처럼 때로는 위로를, 어쩌면 축하를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