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과 기대 사이에서
이거 이렇게 바꾸면 어때?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러면 그냥 네가 해." 바로 뛰쳐나오는 말이다. 고민하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에 토 다는 꼴을 보지 못한다. 믿고 맡겼으면 의견이 달라도 끝까지 두든지, 아니면 직접 바꾸든지 해야 한다. 기껏 오래 걸려서 보여주면 그제야 튀어나오는 이래라 저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발전과 개선을 위한 의견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이 꽉 막힌다. 쏟아부은 내 정성, 그리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고집스러운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쓰면서 남김없이 갈아 넣은 글에 관해 의견을 받는 일은 드물다. 글 쓰는 수만 가지 방법 중 고심해서 고른 방법을 남의 검토를 거치는 과정은 쉽지 않다. 한번 봐줘 정도가 아니라 고칠 수 있는 권한을 넘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남의 말 듣기 싫어하는 나에겐 무엇보다도 큰 결정이자 결심이다.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는 순간이 이런 마음이었다. 꼭 필요한 과정이며 덕분에 나아질 것을 알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생기는 잡음은 없었다. 항상 그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 생각을 우선으로 두었다. 전반적인 조율이 끝나자 그가 말했다. 내 글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책이 어떤 건지 알려줬다. 믿고 맡겨주면 제대로 고쳐보고 싶다고. 더 이상 내게 머물러도 달라질 리 없는 원고와 헤어질 시간이었다. 내 품 안에선 한 글자라도 더 붙잡아 두려고 애쓸 일밖에 없었다. 홀가분하게 넘겼다. 갖가지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나중에 내 글을 못 알아보면 어쩌지. 내 색깔이 다 사라지면 안 되는데. 누구는 편집자가 싹 다 뜯어고쳐서 출간 계약을 파기했다는데. 걱정과 호기심 가득한 시간은 어쨌든 흘러갔다.
얼마나 변했을까? 몇 주 만에 믿고 맡겨주어 감사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수정본을 손에 쥐었다. 두근거리며 슬슬 지겨워지는 원고를 쓱 훑어보았다. 끝까지 다 보고 난 뒤 뜨끔했다. '어라, 생각보다 별로 변한 게 없네?' 처음으로 부담이 확 느껴졌다. 이대로 책이 되는 건가. 내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글자가 그대로 인쇄돼도 괜찮나. 불안과 떨림이 온몸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뭔가 완벽한 환골탈태를 예상했던 모양이다. 곧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며 안심했다. 변함없이 내 글이 맞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바뀐 건지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꼼꼼히 한 줄 한 줄 다 읽어 보고 나서 확신했다. 나보다 더 많이 읽어본 게 확실했다. 이 수준의 정교하고 미묘한 수정은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나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하나의 글이 아니라 수십 개 글이 모인 전체가 머릿속에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의견이었다. 쓰던 순간의 속마음을 들킨 듯한 내용에 놀랐다. 비슷한 의미를 모습만 바꿔서 줄줄 이어지는 문장들. 흐름과 관계없이 머릿속에 튀어나온 생각을 담아 놓은 어색한 문장들. 빠짐없이 모두 편집자의 날카로운 눈에 걸려 쓰러져있었다. 감탄하는 순간이 계속 이어졌다. 잘라가면서도 꼭 남기고 싶다는 내 고집도 들어주었다.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었다. 분명 처음에 고민과 생각으로 백지를 채운 사람은 나였지만, 현재의 다듬어진 모습을 그땐 미처 몰랐었다. 가끔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주었고 내게 영감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거기서 다시 새로운 다듬기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같은 글을 앞에 두고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은 신기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온 힘을 쏟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과정을 겪을수록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최초에 쓰인 초고가 중요하구나. 고쳐질 게 뻔하고 깎여야 하지만 시작은 원석부터다. 시작점에서 모든 게 뻗어나간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수 없고, 잘못된 지점에서 시작해서도 안 된다.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투박하고 서투를지라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다듬을 수 있다. 쓰고 싶다면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게 핵심임을 다시 상기했다. 하나둘 고쳐지는 순간이 처음엔 부끄러웠다. 장황한 표현, 무분별한 반복, 과한 강조와 미사여구, 쓸데없는 감탄문. 다듬어 가면서 낯 뜨거운 반응은 곧 사라졌다. '그래도 내가 썼기 때문에 지금이 있을 수 있구나. 어설프고 못나 보이지만 글로 적어두었기에 이 과정을 겪을 수 있구나.' 글이 변해갈수록 처음의 글을 칭찬할 수 있었다. 그게 없었더라면 지금은 없었다.
어느 날 디자인이 확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파일 하나를 전달받았다. 호기심 가득한 손길로 열어보니 내 글이 담긴 책의 모습이 나타났다. 책을 펼치면 보이는 본문이었다. 그때 실감했다. '와, 진짜 책이 되려나 보다.' 신기함에 들여다보고 있으니 다른 생각도 찾아왔다. '아, 진짜 책이 되어도 되나?' 세상에 이대로 나가도 되는 건가 싶었다. 괜히 한 번 더 원고를 살피게 되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꼭 필요한지 다시 들여다봤다. 인쇄 전에 등장한 책은 나를 그렇게도 떨리게 했다. 편집자는 디자인이 결정되는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여러 고민과 회의를 통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에서 아이디어를 찾아서 넣었다는 대목은 감동이었다. 이런 섬세함이라니. 분명히 그는 나보다 내 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다. 표지와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도 전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은 엉뚱한 장면으로 가득 찼다. 여러 사람이 회의실에 모여 내 글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더욱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장면. 어디서도 겪지 못한 일. 내가 오롯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는 과정은 처음이었다. 부담은 여전했지만 든든했다.
그때부터였다. 우리가 한 팀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진 건. 그와 나는 동등한 입장으로 글과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것에 의견을 주는 게 아니었다. 우리 각자의 것이었다. 모두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아끼고 있었다. 잔소리를 싫어하는 내가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가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이 책을 잘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믿을 수 있었고 온전히 그의 진심을 볼 수 있었다. 오직 나만 믿는 내게 이런 경험은 생소했다. 누군가를 정말 믿고 내 글을 맡기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부담과 기대가 뒤섞인 날이 지나갔다. 의견을 가득 담아 다시 보냈다. 갑자기 몇 개월 전 투고하면서 스쳐 갔던 인연이 떠올랐다. 가장 처음 손을 내밀어 주고 헤어질 때도 끝까지 응원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던 대표님.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근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문장도 깔끔하고, 무엇보다 독자층이 분명해서 아마 많은 사랑을 받을 걸로 예상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날카롭고 현실적인 조언을 모자란 작가 지망생에게 기꺼이 전해주며 힘을 준 대표님. "제가 좀 쓸데없이 말을 길게 했습니다만 잘 듣고 걸러주셔서 좋은 복을 지으신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온다고 다 끝이 아니니 출판사에도 현명하게 요청할 것을 요청하고 출판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애쓰셔서 글 쓴 보람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나중에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곧 책이 나온다는 생각이 그때를 돌아보게 했다.
한 달 뒤. 다음 달이면 책이 나온다. 책을 내기로 마음을 먹은 지 반년이 지났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 단순한 떨림이라기보다는 환상에 대한 거부감이다. 자고 나면 깨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꿈. 깨지 않을 때까지는 나아가 볼 요량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