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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11. 2022

이해 못 할 이유를 향한 이해

그럴 수 있겠다는 따뜻한 인정

보기에 무언가 잘못되어 이유를 묻는다. 조그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에는 원하는 게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게 아니라며 재차 요구한다. 당황한 아이는 전과 비슷한 설명을 조금 다르게 덧붙여본다. 어른은 답답해하며 감추고 있는 진짜를 털어놓으라고 다그친다. 어린 친구는 울상이 된 얼굴로 정말이라며 호소한다. 만족하지 못한 몸이 큰 상대는 받아들일 수 없어 표정을 구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위를 쳐다보는 창백한 눈빛은 초점을 잃어간다.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영원히 맞출 수 없는 스무고개는 반복된다. 문제를 던진 커다란 모습이 흡족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일방적인 규칙을 따르며.


고치고 싶은 양육자로서의 못난 버릇이다. 아이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바라는 내용이 아니라서 공감을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까닭을 품은 이가 내가 아닌데도 생각의 통로를 넓히지 못한 채 보챈다. 좁디좁은 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통 모르겠다며 묻고 또 묻는다. 이쯤 되면 알고 싶어 묻는 게 아니다. 답을 정해두고 익숙한 내 쪽으로 와달라는 의도를 눈에 띄게 숨겨둔 셈이다. 순수한 아이는 거짓 없이 본인의 사정을 거듭 토로하지만 먹히지 않는다. 타인의 이유를 투명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나에겐 소용이 없다. 사랑하는 아들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이유에 집착한다. 뭐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일이 벌어지면 즉시 수사에 착수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꼼꼼하게 되짚는다. 납득할만한 시작을 찾을 때까지 멈추기 싫어한다. 취조당하는 관련인의 불쾌함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묻고 듣는다. 이거다 싶으면 재빠르게 결론짓고 공표해서 마무리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잘 없다. 진술과 증거는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들어맞지 않고 여기저기 삐져나온다. 혼란이 가속될수록 미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애매모호해서 두리뭉실하게 사건을 덮으려는 압박에 끝까지 저항한다. 기어코 완벽한 원인을 밝혀내고 말겠다는 강박으로.


진전이 되지 않고 발이 묶인 수사는 뻔하다. 확보할 수 있는 건 다 나왔고, 배경과 전말도 파악이 끝났다. 정황상 드러난 이유도 정해졌다. 종결을 짓지 못하는 건 단지 나를 넘지 못해서다. 최고 수사관이 용납하지 않으니 미결로 남는다. 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배제하고 객관적 판단을 내려야 하건만 부족하기 그지없다.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마냥 이거 아니라고 외치며 다시 가져오라는 직장 상사와 다를 바 없이 군다. 내가 바라는 이유에 도달할 때까지 처음부터 다시 하자며 모두의 얼굴에 혼을 빼고 광기로 덮는다. 그것도 안 되면 떡하니 서 있는 남의 까닭을 이리저리 입맛대로 깎아대며 이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우겨댄다. 남의 이유가 될 수 없는 내 이유를 들이밀며 무작정 이걸로 하자는 못된 고집쟁이를 자처한다. 내가 고른 게 아니면 안 된다는 무책임한 방침으론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고 깊은 골만 남기고 방치된다. 본인도 견디기 어려운 이도 저도 아닌 희미한 상태로.


있어도 문제지만 없으면 큰일 나는 게 어떤 일의 이유다. 흘러가게 된 근거가 분명히 존재해야 하건만 아예 없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나 서프라이즈에 나올 법한 상황이 바로 옆에서 발생하면 믿기가 힘들다. 왜 그랬냐고 묻는 물음에 단 두 글자로 성의 없고 허망하게 답하면 힘이 쏙 빠진다. 생김새도 흐물흐물한 '그냥'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친해지기 어렵다. 이 녀석이 튀어나오면 대화는 단절된다. 행동의 동기를 물었는데 그런 거 없다고 하니 무어라 반응해야 할까. 의문사로 물었는데 아니라고 대답한 격이다. 이유를 추종하는 세력 중에서도 강성인 고인물은 의외의 한방을 견뎌내지 못하고 머릿속 회로가 꼬여버린다. 세상 어디엔가 '그냥'이라는 말이 실제로 있다는 듯이 내뱉는 상대방을 피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냥이라니. 맙소사, 그냥이라니.


연약한 두 글자를 피해 도망치며 나를 돌아본다. 정녕 그냥 저지른 일이 없었는지. 효율에 미쳐있는 난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이 빠진 행동을 한 적이 없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해서 했거나, 남이 보기 이상해도 내가 좋아서 했다. 내가 한 짓에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늘 줄 서 있었다. 직접 겪은 사례가 없으니 내 쪽을 더 뒤지는 건 의미가 없다. 나와 다른 타인을 향한 합리적 의심은 계속된다. 혹시 이 단어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 하며. 내가 아는 그 그냥이 아니라 다른 그냥으로 사용된 건지도 모르니. 떠올려본다. 대화의 결말 직전에 등장하는 말투, "별 이유 없어. 그냥 했어."를 꺼내는 상대방의 눈빛과 표정을. 내게 이해를 기대하며 변명처럼 길어진 말의 끝에 붙곤 했다. 더 이상 말해도 전해지기 어려우니 그만하고 넘어가자는 식으로.


그렇다면 나도 그런 적이 있다. 내가 판단한 이유를 파고드는 추가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애를 쓰다 쓰다 안되면 그냥을 활용해서 넘어가곤 했다. 싫어서 안 하고, 좋아서 한 일에 대한 해명이 늘 그랬다. 왜 싫은지 좋은지 명확한 이유가 있어도 타인은 고개를 쉽게 끄덕이지 못했다. 답답했지만 당연했다. 나와 같았다면 그걸 똑같이 싫어하고 좋아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내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가끔은 보여줄 설명서가 아예 없어서 가져다 쓰기도 했는데, 그럴 땐 왜 이런 기호가 내 안에 도사리게 된 건지 나도 모를 경우다. 결국 하릴없이 대충 얼버무린 듯하지만 확실하게 결심을 내린 후였다. 남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걸 포기한 순간, '그냥'은 출연했다.


내가 믿는 이유라면 남에게 통할 줄 알았다. 나를 통과하지 못한 그들도 그랬을 테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인풋이 들어가면 아웃풋이 나오듯 모두 같은 프로세스를 거칠 거로 의심치 않았다. 따져보니 변수는 중심에 있는 개개인에 달려있었다. 동일한 이유도 사람마다 해석하고 끌어내는 결론이 달랐다. 내가 아닌 그의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맞았다. 내 비좁은 품에서 파악한 까닭과 다르다고 틀렸다며 다시 찾아보라는 건 폭력이었다. 나도 당하기 싫은 무자비한 행위를 사방에 저지르고 있었다.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핑계를 두르고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몰아쳤다. '그냥'이라는 구조선을 타고 빠져나가는 인원이 점점 늘어난 건 불가항력이었을지도.


내겐 인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그럴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인정(認定). 그리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자세를 내려놓고 나와 다름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인정(人情). 세상이 날 인정하길 바란다면 나도 그래야 한다. 나만 맞는다는, 내가 더 옳다는 잘못된 태도로는 어울려 살 수 없다. 누구에게나 완전한 이유는 없다는 걸 인정할 시간이다. 그에겐 그의 사정이, 나에겐 나의 사정이, 우리에겐 각각의 다른 사정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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