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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1. 2024

편안함을 덮친 요청

아직 개구리도 못 되었기에 올챙이 적 생각 못 할 처지가 아니다. 근데 왜 나아진 것도 없이 마음은 편안해진 걸까. 대학원 생활 1년을 지나 세 번째 학기에 접어들었다. 3번의 등록금 납부로 가계에 확실한 마이너스 표시를 한 것 말곤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듣고 있는 수업은 나를 통과해 빠져나가기 일쑤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과제를 채워 내는 데 급급하다. 답답함과 조급함은 그대로인데 어쩐 일인지 견디는 데 능해졌다. 적응의 동물답게 힘든 것도 그러려니 하며 덤덤해진 모양이다. 자질이 모자라서 불편한 상황에 익숙해져 버렸다고나 할까.


한 번의 사계절을 굴러본 경험과 더불어 우호적인 상황도 한몫을 했다. 한 학기의 2과목 중 절반의 부담이 줄었다. 그동안 한국어교육 관련 강의만 들었는데, 이번엔 한국문화 관련 과목을 하나 선택할 수 있었다. 대학으로 치면 교양과목. 삐딱한 시선으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내게 꼭 맞는 수업이 있어 고민 없이 수강신청을 했다. 한국의 현대문화를 자유롭게 다양한 생각으로 비평하는 분위기가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쭉쭉 떠오르는 날카로움을 내뱉을 기회는 호흡기와 같다. 빡빡하게 몰아세우면 도망자가 늘어나기에, 숨 쉴 틈을 마련해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배려다. 덕분에 석사 과정 한복판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지난해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 스승의 날도 챙길 여유가 있었다. 먼저 졸업논문 지도를 받는 교수님께 논문방 동기들과 마음을 모아 이벤트를 준비했다. 깜짝 꽃배달 선물, 온라인 세미나에서 맞춘 배경 화면, 편지와 음악으로 꾸민 감사 영상까지. 받으시는 스승만큼이나 표현하는 늦깎이 제자들도 뭉클해졌다. 강렬했던 지난 추억과 아직 끝나지 않은 배움의 여정이 감정을 북돋웠다. 또한 대학원 재학생을 대표하는 원우회의 임원으로서 모든 교수님께 보내는 감사 편지를 준비했다. 밝히지 말았어야 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고스란히 숙제로 돌아왔다. "작가님, 짧고 식상하지 않고 재미있게 부탁해요."라는 요청에 고민이 많았다. 결국 내가 느껴온 감사를 일반화해서 글에 옮겼다. 다행히 통과했고, 그대로 전해졌다.       



제 발로 찾아온 대학원이지만, 교수님께서 안 계셨다면 저희는 단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을 겁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갈팡질팡하며 휘청대지만, 교수님 덕분에 꿋꿋이 공부를 이어 나갑니다.

부족한 저희를 아껴 주시고, 믿어 주시고, 이끌어 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당당한 연구자로 태어날 저희를 기꺼이 빚어내는 열정과 헌신에 늘 감동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배우며 따르겠습니다. 



몽글몽글한 기분에 취해있을 무렵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후배가 작년에 수행한 내 과제를 요청하고 있었다. 첫 학기에 칭찬받았던 개인 발표였다. 이미 널리 공유된 자료라서 굳이 내게 묻지 않고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원작자를 존중해서 연락을 해왔다. 기본적인 예의도 차렸겠다, 평가가 끝난 과거의 숙제를 넘기는 건 문제가 없었다. 파일을 열고 전송하려던 찰나, 그때의 내가 겪은 과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망설이다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해당 과목은 이미 정해진 주제 중에서 골라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연락해 온 후배의 주제가 나와 동일했기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 마디로 소재는 고정되어 있었고,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정리와 결론을 내는 연구자의 첫걸음 단계였다. 참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같은 문제를 푼 타인의 답지를 보면 자기 생각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갇히기 마련이다. 만약 내 답을 피해서 다른 답을 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진정한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후배의 무궁무진한 고민의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신의 사고의 틀을 좁히기 싫다고. 먼저 공부한 선배로서 스스로 고민해서 과제를 마무리해달라고 제안했다. 끝낸 후에 서로 다른 고민을 살펴보며 또 다른 공부를 하자고. 하지만 괴로운 고민보다는 당장 과제를 쉽고 편하게 하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선을 넘었나 싶었지만, 나만의 사명감으로 진심을 전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마음을 돌이키길 바라며 조용히 기다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마음이 굳어 있었다.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 과제를 꼭 봐야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자신은 창의적이질 않아서 남의 것을 바탕으로 고민하고 싶다며 간절함을 내비쳤다. 창의력과 정반대에 서 있는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버티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관두었다. 당신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자료를 보냈다. 그는 감사를 전하면서 나의 고민과 연구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난 절대로 그러지 말고, 당신의 고민과 연구를 하라고 마무리 지었다.


여전히 찝찝하다. 콜럼버스의 달걀을 비웃듯이 별것도 아닌데 쩨쩨하게 굴었다는 소문이 날까 봐서는 아니었다. 후배의 공부에 방해가 되었을 것 같아서다. 나도 그땐 누가 길을 좀 알려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서 헤매며 괴로워했다. 한 학기 동안 자다가도 깨면서 고민을 떨치지 못했다. 결과를 떠나서 오랜 고통의 시간은 분명히 날 성장시켰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빼앗은 게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다른 곳에 기대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깨우침의 순간을 막은 거라면 아찔하다.


남 걱정은 길지 않았다. 내게도 주어진 커다란 할 일이 있었다. 듣고 있는 전공과목의 소논문 과제. 백지에 자신의 연구 주제를 선택해 그려야 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에서 시작했다. 해외에 있는 한국인 자녀, 즉 재외동포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의 목적을 살폈다. 여태 한민족과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워 이끌어 왔는데, 요즘 세대 친구들에게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질문을 던졌다. 문제의식이 좋다며 뻔하지 않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교수님의 지도 방향을 염두에 두고, 출구 없는 고민을 이어갔다. 끝내 나름의 목소리를 겨우 담아내었다.


결과는 좋았다.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체계적이며 논리적이라고. 무엇보다도 재밌다는 평이 돋보였다. 아무리 중요해도 재미가 없으면 읽히지 않을 테니까. 한발 더 나아가 교수님은 욕심을 내셨다. 학술지에 투고해서 발표해 보자고 제안했다. 과제 완성도 벅찬 내겐 과한 권유였지만, 일단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결정은 미루어 두었다. 유독 감기가 심해서 누워있던 시간이 길었던 이번 학기. 끙끙 앓으면서도 다가오는 납기일에 맞춰 머릿속이 복잡해 쉽게 낫질 못했던 게 아닌지. 다시 한번 들인 노력은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고생한 날 다독이며 편하게 잠들었다.


개운한 아침, 낯선 이름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다시 보니 40여 명의 동기 중 한 명이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전혀 없는. 동기는 전날 발표하면서 받은 피드백을 어려워하다가 도움을 청했다. 내까짓 게 뭐라고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거절하려 했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했고. 그러다 오죽했으면 나한테 연락했을까 싶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루의 시간을 들여 동기의 자료와 발표를 여러 번 읽고 들었다.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라면 이렇게 했을 방안을 추려 전달했다. 쥐어짰기에 다시 물어도 더는 나올 게 없었다. 돌아온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물론 예의였겠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며 고맙다고. 가르쳐 준 게 앞으로 계속 유용할 거라면서. 


연달아 타인의 요청을 겪고 나자 엉뚱한 의구심에 빠졌다. 혼자 고민의 독에 빠져 죽더라도 남에겐 살려달라 빌지 않는 고집은 옳은 것인가. 모르면 배우는 게 당연한데 무턱대고 껴안고 있는 게 맞는가. 물어볼 용기가 없는 것과 스스로 해낼 용기가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남에게 던질 고민 덩어리가 미안한 건지, 받은 도움을 향해 전하는 감사가 어려운 건지. 점점 단단한 혼자가 좋아지는데,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할 선생님이 어울리려나. 정확히 공부의 절반을 지나는 시점에 떠오른 상념에 온통 난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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