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앞선 자의 괜한 으름장을 싫어한다. 그와 내가 다를 게 별로 없는 데도 겁주는 꼴이 우습다. 그저 시간의 흐름대로 누구나 밟아 나가는 과정인데 으스대는 느낌이 별로다. '웰컴 투 헬'이라고 빈정대며 본인은 잘도 벗어난 고생길을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미리 해 본 선배라면 차분하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과 할 수 있다는 응원을 건네는 게 옳지 않을까. 마치 아래를 보듯 가르치는 말투로 던져대는 영양가 없는 공갈을 자꾸 듣다 보면 세대 갈등의 원인을 알게 될 따름이다. 도대체 석사 두 번째 학기가 어떻길래.
소문이 자자한 2과목을 수강하며 시작된 새 학기. 멀리 퍼진 유명한 평판은 아무래도 선플보단 악플이다. 무척 어렵고 아주 할 게 많아 정말 괴롭다는. 힘들지 않은 수업이 어딨겠냐며 늘 하는 불평이려니 귓등으로 들었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고통이요, 과정을 지나면서 얻는 기쁨으로 산다고 믿으므로. 컵에 물이 반이 있으면 아쉬워하지 않고 다행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목마름이 기본값인데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밑바닥에 깔아둔 만반의 준비 덕분이었을까. 강의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남들 투덜댈 때 나만 이렇게 재밌게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깜빡했다. 첫 학기 때도 과제가 몰려오기 전까지는 즐거웠다는 걸. 남이 고민해서 전하는 지혜를 눈과 귀만 열고 받아먹는 건 쉬울 수밖에. 새롭게 마주한 위기를 간단하게 늘어놓아 보겠다. 한 과목은 한국어 교재를 분석해서 새로운 교재를 기획하는 것이고, 다른 한 과목은 한국어 사용 데이터를 기반하여 나만의 주제로 소논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읽기만 해도 모른 척하고 싶은 숙제인 걸 당신의 반응을 듣지 않아도 안다. 기가 막히는 조건을 하나 더 풀어놓자면, 첫 번째 과제가 팀 프로젝트라는 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손발이 쪼그라들지 않는가. 내 맘 같지 않은 남과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지. 마지막으로, 학교 측에겐 화룡점정이지만 학생 측에서는 사면초가로 받아들이는 장치가 있다. 학점을 말아먹더라도 책상에서 혼자 망하고 마는 방식을 철저히 막아두었다. 모두의 앞에 서서 계획과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교수님의 수정 방향이 담긴 조언을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들어야 한다. 이러니 대충 망치고 포기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느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놀라운 학습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몰아쳤는데, 아무래도 남 눈치가 보이는 팀플이 신경을 더 자극했다. 솔플과 달리 함께하려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그러기 위해 회의가 필요하고, 역할 분담과 마감 일정이 뒤따른다. 엄청난 시간과 기력이 소비된다는 뜻이다. 엄두가 나지 않아 납작 엎드려 버티지만 길지 않다. 같이 하는 팀원에게 미안해서 될 대로 되라며 한도 끝도 없이 미루며 처박아 둘 수 없으므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어깨동무하고 천천히 나아가게 된다. 가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편한 대로 숨으며 모른척하고 신세 지는 빌런이 등장해서 모두의 마음을 후벼파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전생에 쌓은 덕이 넉넉했는지 다행히 우리 팀에 몰상식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한 명 한 명 책임과 정성이 넘치는 귀한 인연을 만났다. 각자 본업의 바쁨 속에서 공부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독려하며 이끌었다. 배려심 깊은 따뜻한 동료와 한눈팔기 어렵게 짜인 여정 덕분에 배운 게 많은 시간이었음을 인정한다. 마지막 수업을 제때 못 듣고 결석한 실수는 바보 혼자 저지른 옥의 티였을 뿐.
이제 남은 건, 하는 것도 쥐뿔 없으면서 마음속 응어리만 똘똘 뭉치며 학기 내내 괴로워하던 개인 과제. 그냥 하기 싫은 건지, 어려워 피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질질 끌고 다녔다. 우연히 칭찬 일색으로 마쳤던 첫 학기의 발표가 부담으로 돌아왔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무언가 보여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시선을 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깊은 고민보다는 들뜬 태도로 가득한 계획 발표는 별로였다. 핵심 내용이 흐릿하게 담기는 바람에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되묻는 코멘트로 마무리되었다. 그 당시엔 뭔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거짓말처럼 학기 말이 될 때까지 손을 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자잘한 일거리도 전부 없애주며 자신만의 주장에 집중하라는 스승의 선의가 무색하게도.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새벽, 머릿속으로만 굴리느라 아무 진전이 없던 과제를 드디어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꿈쩍하지 않고 허기도 느끼지 못한 채 집중했다. 해가 지기 전에 초고를 완성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겨우 끈 덕분에 결과 발표를 해냈다. 처음의 엉성한 기획과 달리 구체적이고 새로운 발견을 제시했다는 평은 보람으로 돌아왔다. 썩어가던 속이 마법같이 회복되었다.
어찌어찌 버틴 일 년을 돌아보면 쌓아온 과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선 회사에서 다루던 데이터, 통계 작업이 쓸모가 많다. 대부분의 문과 출신 동기들이 겁부터 내는 자세가 다행히 내겐 없다. 또한 상사에게 수없이 보고하던 경험도 자산이다. 눈감고도 그려지는 각종 문서와 몸에 밴 발표 기술은 어디 가지 않았다. 꾸준히 읽는 습관도 공부의 밑바탕이다. 언젠가 읽었던 책의 지식이 돕기도 하고, 새로 읽어야 하는 정보를 습득하기도 수월하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길러온 글쓰기 근육에 큰 빚을 졌다. 결국 연구자로서 드러내는 결과물은 글이다. 학문적 글쓰기의 특징이 분명 따로 있지만, 글은 글이었다. 독자에게 흥미를 주면서 쉽게 읽혀야 한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탄탄한 흐름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같은 의견도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전달력과 매력도가 달라진다. 정말 잘 쓰고 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반대편의 독자를 떠올리며 즐겁게 임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신나게 쓰는 것과 다르지 않게.
직접 배워서 남 줄 게 없다는 걸 배우면서 배워간다. 찍으며 걸어온 점들이 어떻게 연결될지 그때는 예측할 수 없었다.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또는 마음이 동해서 익히고 연습했을 뿐이었다. 뿌려둔 씨앗을 잊고 있어도 언젠가 싹이 나듯, 이별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구원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뻔한 말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도 내일도 영원히 깨닫는 게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하는 공부는 배워서 남을 가르치는 학문이지만, 그 자리에 서려면 내가 제대로 배워야 한다. 스스로 퍼주고도 훨씬 남아서 넘치도록 쌓아두는 노력으로. 새삼 다른 이를 가르치는 일이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배워서 남에게 줄 수 있을까. 이 또한 앞으로 걸어야 알 수 있다. 멈추지 않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