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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07. 2024

끝이 보이지 않던 휴식

회사를 쉬면서 휴일이란 개념이 사라졌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야 하는 압박이 풀리자 벌어진 일이다. 쉬는 날이 따로 없지만, 노는 날만 계속되진 않는다. 출근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숨을 쉬는 삶이란 바쁘게 돌아가기 마련이니. 다만, 주중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했다. 아이의 등교와 아내의 출근으로 희미한 구분을 해낼 뿐이었다. 한동안 불분명한 일주일을 보냈는데, 배우는 대학원생이 되어보니 뚜렷한 평일이 생겼다. 있으나 마나 했던 토요일과 일요일을 반기며 잠시 학업을 놓는 권리를 누렸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반년을 보냈다. 강의와 시험과 과제로 가득했던 첫 학기가 끝나자 끝없는 휴일을 얻었다. 지금도 생소한 방학. 누구도 보채지 않는 시간이 참 달았다.


얼마나 시간에 쪼들렸는지 보여주겠다는 자세로 밀려있던 일정을 착착 소화해 나갔다. 한국을 방문해서 가족을 만났고, 고민하던 퇴사를 결정하며 회사를 떠났다. 이게 바로 고생한 학생의 휴식이라는 듯 먹고 놀고 자고를 반복했다. 늘어지길 바랐던 건 나뿐이었는지 동기들은 놀라운 제안을 했다. 긴 방학을 알찬 스터디 모임으로 채워보자는 눈을 의심케 하는 발언. 학문이 적힌 글자가 당장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주변을 의식하는 본능은 그러든지 말든지를 행하지 못했다. 나만 빼고 무언가 가치 있게 돌아가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특별히 열심히 하는 건 없었지만, 단지 무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했다. 가끔 챙겨 먹는 정보와 움찔하게 만드는 감탄으로 들어오길 잘했다며 스스로 쓰다듬었다. 자기 위안 대회가 있다면 입상은 기본일 테다.


부지런하고 생각이 깊은 동기 대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석사 공부란 무엇인지, 논문 작성이란 어떤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학원 초보 우리 기수를 위해 졸업하는 선배를 줄줄이 초청했다. 갓 태어나 따끈따끈한 논문을 완성한 앞선 자의 열정과 지식은 효과적이었다. 자신감이 넘쳤고 경험 또한 차고 흘렀다. 기대표의 섭외는 그야말로 탁월했다. 너무 멀리 있어 닿기 어렵고 부족한 깜냥으로 모두 소화하긴 어려웠지만, 은혜 같은 물줄기를 주야장천 맞고 보니 적당한 얼룩이 남았다. 본인의 연구는 자신이 정해서 끌고 가는 것이니 연구자의 확신을 갖자는 다소 무분별한 자신감을 챙겼다. 대책 없이 '나도 할 수 있다!' 구호를 외치던 중 현실을 파악하라는 공지가 도착했다. 첫 학기 성적 열람 안내.


잘한 건 없지만 서도 안 한 것도 없었기에 일말의 기대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복권 당첨을 바라는 것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은 습관이니까. 기억이 맞는다면 대학 시절 내내 받아본 적 없는 최고 학점을 받았다. 심지어 두 과목 모두. 따라오기만 하면 점수를 잘 준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럴 줄이야. 보기만 해도 무거운 등급을 아내에게 알렸다. 머리가 빠른 그녀는 바로 되물었다. "장학금 받는 거 아냐?" 성적 우수 장학 제도는 어느 학교에나 있다. 그저 나와 친하지 않을 뿐. 무사 졸업을 목표로 삼은 평범 추구형 학생답게 손사래를 쳤다. 언젠가 아내의 촉은 무시하면 안 된다고 했었는데, 어느 날 희한한 메일이 도착했다. 성정 우수 장학 선정 안내. 벌이가 없던 백수가 학비를 벌어왔다. 연말 대상을 받은 것 마냥 배려해 준 가족 덕분이라고 한동안 감사 멘트를 반사적으로 뱉곤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가르치려는 동문이 모인 대학원에 다닌다. 학기 중엔 줄기차게 화면으로 만나며 안부를 확인했다. 방학 중엔 아무래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가정과 생업이 있으니 느슨해지기 마련인데, 행정 사무실에선 다 계획이 있었다. 곳곳에 살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 인사와 초대를 건네는 시도를 도모했다. 전공 유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을 나에게 의뢰했다. 호주에서 지내는 생활과 1학기를 보낸 소감을 편안하게 이야기해 달라며. 누군가 날 찾으면 최대한 호응한다. 아쉽게도 그땐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한국으로 떠나 학생과는 또 다른 인격인 '글 쓰는 자아'를 펼칠 예정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 여유와 여력이 모두 없었다.


당장은 어렵다는 내 사정의 이해는 물론이고 엄청난 응원을 받았다. 출간을 축하하며 꼭 사서 보겠다는 조교 선생님의 말씀이 따뜻했다. 나보다 먼저 나서서 교수님들께도 소식을 전해줬다. 온라인 회의에서 만난 주임 교수님의 개인 축하 메시지에 깜짝 놀라기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실어 서명한 책을 사무실로 보내드렸다. 책이 나온 후 지푸라기라도 잡자며 소개한 동기, 선배에게도 큰 감동을 받았다. 단톡방에 책 홍보를 하고 나면 쥐구멍에 숨곤 하는데, 돌아오는 반응을 훔쳐보다 마음이 끓었다. 갖가지 뜨거운 관심과 근사한 격려를 잔뜩 받았다. 회사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걷어내고 사라진 소속감에 헛헛했었는데, 같은 배움의 길을 걷는 학교라는 품 안에 들어온 기분을 한껏 느꼈다. 다시 돌아온 호주에서 그들을 향한 고마움을 영상에 그대로 담아 보냈다. 



[글로벌톡톡] 호주 신입생 이야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작과 다르게 마지막은 늘 성큼 다가온다. 달이 두 번이나 바뀌는 여름방학이 얼마 안 남은 티를 팍팍 냈다. 풀어 놓았던 마음을 다잡으라는 듯 기획 특강이 연달아 열렸다. 뜻깊은 지식의 습득까지는 못 하고, 헤벌렸던 입을 다물며 공부하는 처지를 깨닫는 정도에 그쳤다. 겨우 풀렸던 눈을 바로 뜨자마자 선택의 기로가 나를 덮쳤다. 다음 학기에는 어떤 과목에 도전할 거냐고 묻는 수강 신청. 결정권을 손에 넣으면 쾌락보단 불안이 크다. 찾아올 불확실성을 온몸으로 책임져야 하므로. 남이 정해주는 삶에 익숙한 식판 밥 마니아는 낯선 권한에 벌벌 떨며 지낸다.


해내야 하는 사람이 뻔한 일 처리를 마치고, 다가올 텅 빈 시간을 바라봤다. 잠시 잊고 있던 고통의 지난 학기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그 이상은 괴로울 텐데 어쩌나. 신입생으로서 수없이 흘리고 다녔던 자기 소개말이 문득 스쳤다. 어려워도 꾸준히 계속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외치던. 학생보다 먼저 포기하지 않는 선생님이 될 거라는 다짐을 이제 와 모른 척할 순 없다. 첫걸음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다음 걸음. 흔들림 없이 내딛자. 누가 시킨 게 아니니 온전하게 날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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