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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5. 2024

근거 없는 까만 믿음

졸업식이 다가온다. 그간의 고생을 뒤로하고 환하게 웃는 주인공으로 서는 자리면 참 좋으련만, 난 대상이 아니다. 일 년 먼저 들어온 선배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여름방학 마무리 행사다. 축하하는 마음 반, 부러워하는 마음 반으로 앞선 자가 거둔 유종의 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별생각 없이 졸업자 명단을 살펴보다가 문득 공허를 느끼곤 한 발짝 물러선다. 인원이 적다. 예상보다 더 많이. 제때 마치지 못한 각각의 여러 사정이 있을 테다. 불현듯 시간을 휘감아 내년 이맘때로 돌려 본다. 그곳에 난 서 있을 수 있을까. 이번 방학을 돌아보면 가늠할 수 있으려나.


세 번째 학기의 모든 과제를 제출하고 후련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끝냈다는 기분은 상쾌하다. 이어서 찾아온 세 번째 방학의 달콤함은, 그리 길지 못했다. 끝나고도 끝나지 않은 듯 다음 학기와 이어졌기 때문에. 네 번째 학기에는 한국어교육 현장 실습이 예정되어 있다. 그 어떤 강의보다도 중요한 실전을 배우는 시간이다. 단순히 앉아서 머리를 싸매는 배움이 아니기에 일찍부터 미리 안내가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실제 수업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방문해서 참관해야 한다. 외국에 있는 학생이라면 스스로 현지의 적합한 교육 기관을 찾아서 섭외해야만 했다. 해당 분야의 무경험자인 내겐 막막했다. 학교의 친절한 배려로 후보 연락처 목록을 받았어도 속은 편치 않았다. 어느새 후련과 상쾌와 달콤은 불안과 막막과 씁쓸로 변해있었다.


살아보면 완벽한 답답은 별로 없다. 견디다 보면 한 줄기 빛이 늘 존재했다. 눈 딱 감고 한 군데 한 군데 똑똑 노크하려던 찰나, 실습수업을 돕는 조교 선생님이 혹시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우리 대학원 산하 한국어 교육 기관의 수업을 참관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라며, 귀국 일정을 알려주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보겠다고. 때론 현실은 거짓말 같다. 마침 아이의 방학에 맞춰 짧은 한국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출구를 반기며 빡빡한 달력에서 가능한 날짜를 뽑아 전했다. 얼마 뒤 받은 전적으로 내게 맞춘 듯한 참관 수업 일자는 기적과 다르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대학원 방문이 예정되자 인사드릴 곳이 떠올랐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스승에게 말도 없이 오가는 게 내심 걸렸다. 주임 교수님과 논문지도 교수님께 급작스런 상황을 알리며 찾아뵙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아쉽게도 스케줄은 엇갈렸고, 다음에 꼭 보자는 인사를 나눴다. 그다지 살갑지 않은 나로선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곧 날아간 한국에서 말로만 듣고 영상으로만 보던 한국어 수업을 직접 맛봤다. 그날의 감정은 복잡다단하다. 놀랍고 어렵고 새롭고 떨렸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 속이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할까 애태우던 때보다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만족에 편해졌다. 


순식간에 호주 땅을 다시 밟았는데, 의외의 연락을 받았다. 왜 한국에 오면서 알리지 않았냐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동기 대표였다. 헌신과 정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가 방학을 맞아 들어온 동기들을 빠짐없이 챙기고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긴박한 여정이었음을 고백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의 등장으로 불현듯 지난 일 년 간의 자발적 일꾼 생활이 끝나감을 깨달았다. 이번 방학이 지나면 그와 함께했던 대학원 학생회, 원우회의 미디어 국장 활동도 종료된다. 이와 더불어 총무로 활동한 대학원 학회 임원의 임기도 끝난다. 최종 업무였던 졸업 회원 선물과 집필료 지원을 마친 상태다. 두 자리나 차지하면서 딱히 한 일이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지니고 있던 부담감에서 해방된다고 하니 개운해졌다. 


가진 깜냥에 벅차도록 두 곳에나 발을 걸치고 겨우 버텼다. 다음 후배 임원에게 양쪽 인수인계를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제 앞길 가리지 못하는 시절에 그저 봉사하는 심정으로 묵묵히 걸어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맡았다는 뿌듯함이 대부분이었지만, 신경을 건드리는 몇몇에 힘들기도 했다. 오로지 제 것만 챙기는 자에겐 타인의 수고가 보이지 않았다. 입이나 손으로 가볍게 전하는 감사와 격려도 아까운 그들은 너무했다. 임기를 마치는 동기 대표이자 원우회장의 마지막 인사에도 절대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필요에만 움직이고 응답했다. 어떻게 이렇게 밉상 맞은가 싶어 마음이 달아올랐다가, 곧 단념하고 편해졌다. 어딜 가도 있는 그저 그런 인물에 힘을 쏟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와 함께했던 사람에게 집중했다. 언젠가 부디 직접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고생을 어루만졌다. 결국 일 끝엔 사람이 남는다.


흘러간 여러 일 중에서 방학 내내 날 짓누른 건 오직 하나였다. 석사학위를 위해 넘어야 하는 큰 산, 졸업논문. 지난 학기부터 논문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주로 앞서가는 선배들을 관찰하며 배우는 입장이었다.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이는 과정이 점점 다가오는 전개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기어코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이 정해졌다. 학기의 끝에 처음으로 모든 교수님 앞에서 논문의 주제를 발표하는 순서. 다른 학교는 어떻게 진행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학교는 완전히 열린 상황에서 자신의 논문을 단계적으로 공개하며 완성도를 높여간다. 그간의 고민을 정리해서 선보이고, 지도 교수님 외 교수님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몰래 완성본을 슬쩍 들이대고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정반대라 기겁했다.


영원히 내 일이 아닐 거라 믿었던 신입생 시절에도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이해조차 어려운 선배들의 내용에 더해지는 날카롭고 철저한 코멘트는 옆에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연구자 개인의 안목을 넘어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는 값진 시간이란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주인공이 된다는 상상은 아찔했다. 제대로 배우며 성장하는 올바른 절차는 치열하며 쓰디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멀게만 느껴졌던 불과 일 년 전에는 궁금함만 가득했었다. 난 어떤 내용으로 저 자리에 서 있을지. 코 앞에 닥친 현재는 모두 원망이 대체했다. 다가올 게 뻔했는데도 손 놓고 있던 자신을 탓하느라.


첫 번째 논문 발표회를 앞두고 지도 교수님의 집중 관리가 이어졌다. 지도받는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은 답답해졌다.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꿈도 잘 꾸지 않는 내가 준비 없이 참여했다가 혼나는 꿈을 꾸었으니 말 다했다. 다행히 끝없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간은 마감일을 정해두었다. 그때까지의 최선을 내보였고, 고려해야 할 요소를 산더미만큼 받았다. 논문으로써 부족해 보이는 지점이 많아 쉽지 않은 길이 예상된다고. 그나마 한 가지 인정받은 건, 해당 주제를 향한 열정과 집념이었다. 정말로 좋아하기에 뭐라도 만들어낼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열어두고 천천히 방향을 잡아보자고 했다. 그렇게 지도 교수님의 조건부 응원을 등에 업고 공개된 자리에 처음 나섰다.


반응은 엇갈렸다. 재밌는 주제라서 기대된다는 긍정의 느낌표와 더불어 논문으로 이어질지 모르겠다는 의문의 물음표. 한 마디 한 마디 귀중한 고견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꼭꼭 눌러 담았다. 바로 어떻게 적용하고 나아가야 할지는 거의 알 수 없었다. 다만, 첫발을 뗐으니 어떻게든 시작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발표 후에 다시 모인 논문지도 세미나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지도 교수님은 아직 크게 보는 단계이므로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위로와 격려를 위한 다소 과장된 구호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힘을 냈다. 열어두고 방학 동안 고민을 해보자는 숙제 같은 작별 인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물론 열기는 곧장 식어버렸다. 남이 주는 강제적 압박이 사라진 여유는 부유하기 딱 좋았다. 천성이 벼락치기 체질인지 서서히 고민을 이어가는 감각이 부족하다. 행동은 없고 시간은 흘렀다. 언제까지고 미뤄둔 덕에 몸은 편했다. 양심은 있는 모양인지 뱃속 아래에서 사라지지 않는 껄끄러움을 종종 느꼈다. 이러다 사라질 방학이 확실해서 뒤로 가는 날짜만 아쉬워하다 지푸라기를 부여잡았다. 같은 논문방의 마음 따뜻한 동기 방장이 자율 스터디 모임을 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면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허송세월하지 않도록 챙겼다. 자신이 정한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멤버에게 이모티콘을 선물하는 벌칙도 정했는데, 서로 선물함이 가득 차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대단한 진도는 없었어도 한쪽 구석으로 처박지 못하도록 긴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큰 몫을 했다. 가지고 있는 논문의 주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정말로 하고 싶은지, 아예 다른 주제는 없는지 생각을 거듭했다. 


어느덧 잠잠하던 학교에서 이런저런 안내가 날아드는 모양새가 이제 쉬는 시간이 끝났나 보다. 시작 전엔 두 달이 넘는 기간이 무궁무진해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애걔?’로 변하는 당연한 이치가 신비롭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졸업논문을 향한 걱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한 나의 논문이 어떻게 흘러갈지 깜깜하다. 하지만 일 년 반 동안 어깨너머로 배우며 깨달은 게 있다. 스스로 내던지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끌려갈 거라는 안도. 도망가지 않고 붙어있기만 한다면 반드시 졸업식에 참석할 거라는 확신. 아무 근거 없는 까만 믿음을 꼬옥 쥐고 나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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