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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trea Jun 22. 2019

9. 길 위의 아저씨

캄보디아 4년 차 NGO 현장활동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30분쯤 큰길을 따라오다 보면 집으로 가는 사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에서 매일 마주치는 아저씨 한분이 계신다.
 
아저씨를 처음 마주한 건 몇 개월 즘 전이었을 거다.
멍하니 있던 나에게 다가와 두 손을 벌리던 거리 위의 아저씨.
처음엔 멍했던 나에게 갑자기 나타나 다가왔기에
나도 모르게 "아 깜짝 아!"라고 소리 질렀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도 아저씨는 자주 보였고 또 어김없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미 헤져버린 옷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었고,
어느 날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날엔 시큼한 냄새마저 느껴졌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가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벌리고 있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거나 나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어느 날은 도로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아이처럼 계셨고, 또 어느 날엔 길가에서 흙장난을 치고 계셨다.
 
그 아저씨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아니 지금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몇 달 여 퇴근길의 그냥 익숙한 풍경 중 하나가 돼버린듯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의문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노숙자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그들을 실질적으로 돕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단지 돈을 주는 것은 그들의 삶을 나태하게 만들 뿐 자립하는 길을 찾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길 위의 사람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나 스스로 생각한 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의 선을 만들었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노인들에겐 기꺼이 주머니를 여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왜 열지 않느냐 묻는다면, 뒤에 누군가 배후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혹은 엄마가 아이들을 시켜 더 동정심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캄보디아에는 내가 마주하는 이 아저씨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듣기로는 프놈펜에서 한 번씩 길의 정화를 위해 거리 위의 아이들, 사람들을 밖으로 내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설에 맡겨지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거리로 내몰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생각의 끝에는 다시 내가 마주하는 아저씨가 떠오른다.

아저씨는 왜 매일 이 곳을 서성이며 다니는 걸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냥 마음이 조금 아픈 분이신 걸까.
아니면 어떤 절실함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꾸 무너져내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여전히 이 길 위에서 살만하기에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는 걸까.
반대로 세상과의 끈을 아예 놓아버리려 하는 걸까.
이 곳의 생활에 만족하시는 걸까..

게다가 대부분 길 위의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왜 이분은 늘 혼자인 거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하는 누군가가 있나.
이런 분들에게는 어떤 동기가 필요한 걸까 등등..

사람의 존재는 어떤 사람이고 천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저씨를 대할 때 하찮게 대한다.
분명 어떤 사연이 있었을 한 존재인데 말이다.

이제는 풍경같이 익숙해져 버린 분이라 왠지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날엔 불안할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부디 길 위에서 없어지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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