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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rah Apr 17. 2017

나에겐 서울대 졸업 앨범이 없다

1. 이상한 합격기

한국에서 서울대 출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그걸 어떻게 이용해보려고 하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 살다 보면 어쩌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출신 대학과 전공을 다들 돌아가며 이야기하는 순간이 오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순간이 정말 자주 찾아온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서울대’를 나왔다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좌중의 눈빛이 달라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나에 대한 다른 정보들은 쉬이 잊어도 그 대학 출신인 것만은 여간해선 잊지 않는다. 소름 끼치게 자주 찾아오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오는 순간이 되면 다들 내가 그 대학 출신인 걸 상기하고 다시금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 


나는 이런 느낌이 아주 불편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서울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양자택일을 하라면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이 으레 그 대학 출신들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싫다. 


나는 대구의 어느 구석 동네 평범한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역사는 제법 오래되어 어른들은 이름을 대면 거의 대부분 아는 학교였지만 오래돼서 유명했을 뿐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이미지로 각인된 학교는 전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히, 다른 학교 다 하는 야간 자율학습시키는 정도였달까. 


그런 학교에서 나는 줄곧 반에서 4~5등 정도를 했다. 한 학년에 600명이 넘는 거대학교임을 감안하더라도 그 성적으로 서울대는커녕 연세대, 고려대도 꿈꾸기 힘들었다. 주제 파악이 정확한 편이었던 나는 그런 대학을 가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역사 교사를 꿈꿨기에 경북대 역사교육과를 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 이상은 꿈꾸지 않았을뿐더러 꿈꿀 필요도 없었다. 서울대가 목표인 친한 친구가 주변에 있었지만 그 친구는 늘 전교 1등이나 2등을 놓치지 않던 진짜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서울대는 저런 애들이 가는 덴가 보다.’ 생각하곤 했다. 나와는 다른 종족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랬던 내가 덜컥 서울대에 합격하게 된 것은 2002년 치러진 수능에서 언어영역이 몹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과목만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하고 못하는 과목은 아예 포기해버리는 편식 심한 학생이었는데 평소 국어를 좋아해 언어영역은 자주,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했다. 책도 많이 읽는 편이었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혼자 오래도록 생각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도 그 해 수능에서 언어영역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당시 언어영역 만점은 120점이었고 나는 보통 모의고사에서 110점 이상을 받아왔다. 그런데 수능에서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0점을 간신히 넘긴 점수를 받았다. 수리영역은 원래 아예 포기하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고 다른 영역 점수는 평소와 비슷해서 모의고사에 비해 점수가 낮게 나왔다. ‘수능 망했다. 큰일이다.’ 생각하고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굉장히 많은 친구들이 울고 있었다. 언어영역은 다들 망쳤고 그 여파가 다음 과목에까지 이어져 줄줄이 수능을 망친 것이었다. 언어영역에서 100점을 넘긴 사람이 전국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경북대는 갈 수 있겠다. 다행이다 생각했다. 


대학원서를 내기 위해 상담을 할 때 담임선생님이 처음으로 서울대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내보는 게 어떠냐는 거였다. 그때 나는 선생님에게 “장난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진심이었다. 나보다 1년 선배 중에도 나와 비슷한 성적이었는데 서울대 간 사람이 있다고 했다. 


비밀은 당시 대학과 단과대별로 총점이 아닌 영역별 점수의 총합을 봤던 데에 있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는 당시 언어영역, 사회탐구영역, 외국어영역 점수의 합만 봤는데 선생님은 내 점수의 합이 서울대에 갈 정도가 되겠다고 판단하신 거였다. 


당시 경북대는 ‘가군’에속해있었고, 서울대는 ‘나군’이었다. 가, 나, 다군에 있는 대학교 중 각각 한 곳씩 원서를 낼 수 있었는데 우리 집안 형편상 사립대학은 갈 수 없었다. 다군에는 내가 갈 만한 국립대가 없었고 그렇다고 원서를 딱 한 군데만 내는 건 어쩐지 이상하니까 원서비 버리는 셈 치고 서울대에도 원서를 내보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대에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서울대에 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그랬다. 돌아보면 오직 담임 선생님만이 내가 서울대에 갈 거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경북대는 무난히 서류 합격을 하고 면접을 봤다. 면접 때 교수님 중 한 분이 경북대 말고 또 어느 학교에 원서를 냈는지 물어보셨다. 내가 ‘서울대’라고 답하자 다들 놀라시며 ‘그럼 서울대에 합격하면 경북대에는 오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그때 내가 자신 있게, 망설임 없이 한 대답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경북대는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설령 서울대에 합격한다고 해도 저는 경북대를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서울대 합격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서류전형에 합격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러다가 정말 서울대 가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뭐 어차피 면접에서 최종 탈락할 거니까.’ 마음이 편하니 면접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이야기하고 나왔던 것 같다. ‘샤’ 모양의 교문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 안녕.’ 이렇게 마음속으로 인사한 기억도 난다. 


서울대 최종 합격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같은 반 친구로 늘 문과 1,2등을 도맡아 하던 아이였다. 그 친구는 사회대에 지원해 합격을 했는데 내 수험번호를 알려줬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 터라 내 것까지 검색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 날 엄마와 심하게 다투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온 집안은 충격에 휩싸였고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아무도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서울대 합격하고도 가족에게 축하인사 못 받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엄마는 사실 나를 서울대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조신하게 집과 가까운 대학에 가서 취직하고 시집가면 된다고 믿는 보수적인 분이었다. 그리고 경북대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과 기숙사에 떨어졌을 경우 월세까지 들게 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등록 마지막 날 엄마는 서울대에 등록금을 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했음을 굳이 말해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졸업식날, 그 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 학교에서는 서울대 합격자가 무려 10명이 나왔다. 1년에 한 명을 보낼까 말까 하는 학교에서는 대형 사건이었다. 보통 서울대 합격생에게 동창회에서 소정의 장학금을 줬는데 그 해 10명이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한 명에게 줄 금액을 10명에게 나눠서 줬을 정도였다. 이름이 호명되고 내가 단상에 올라가는데 어떤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도 서울대 가나?” 그랬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서울대 갈 애’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이 이후에도 한 번씩 기억나는 것은 이후 대학 생활 역시 느닷없이 느닷없는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겪는 일, 받는 느낌이 많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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