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도리언 그레이. 미소년이다. 예술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의 현신이요, 누구든 그를 보면 우아하고 고귀한 외모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바질이라는 화가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그린다. 화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예술혼을 불사른다. 후에 그 자신이 도리언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숭배에 가깝다.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의 친구인 헨리 경과 교류하며 변한다. 순수하던 청년이 어느 새 시니컬한 냉혈한이 된다. 결혼을 약속한 시빌 베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도리언은 자기 탓이 아니라 합리화하며 일과를 이어간다. 그가 파멸로 이끈 관계는 이 외에도 여럿이다.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다.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 초상화 속 도리언 그레이의 모습이 변해간다. 그가 타락할수록 점점 더. 초상화에 숨겨진 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도리언은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다.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한편, 현실 속 그의 미모는 미소년 시절 그대로다. 아름다운 겉모습은 여전하지만, 그의 내면은 서서히 흑화한다. 그의 타락을 그의 초상화는 알고 있다. 그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유일한 진정한 친구인 바질도 안다. 나머지 사람들은... 미모가 모든 것을 가린다. 그의 양심마저도. 그러다가. 누이의 죽음에 앙심을 품은 제임스 베인이 자기 곁을 맴도는 걸 알게 된 이후 도리언 그레이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토록 경계하던 제임스 베인마저 죽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이제는 착하게 살겠다며 결심하는 도리언. 하지만, 그의 언행은 여전히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뿐이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은 자기만의 착각이다. 생의 마지막. 일심동체 같았던 헨리와 조금씩 분리되는 모습을 보이던 도리언은 비참하고 쓸쓸하게 최후를 맞는다. 이제 그는 없고 초상화만 남았다. 다시 고와진 모습으로.
오묘한 인간관계
여러 등장 인물 중에서도 세 명이 중심축이 된다. 화가인 바질, 바질의 친구인 헨리, 그리고 도리언. 초상화 모델을 서다가 헨리를 알게 된다. 이후 도리언은 헨리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가까워지는 것 이상이다. 동화 내지는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바질이 경계하던 일이 벌어졌다. 헨리와 교류한 이후 도리언은 바질과 거의 만나지 않는다. 더 이상 초상화의 모델로 서지도 않는다. 하지만, 매일같이 만나는 각별한 사이인 헨리에게 도리언은 비밀을 말하지 못한다. 헨리 역시 20여 년을 그대로인 도리언의 미모와 겉보기에 빛나는 삶을 부러워한다. 서로를 잘 아는 듯 알지 못하는 모습. 지성인이자 귀족인 헨리. 그가 내뱉는 말은 일면 철학적인 듯 들리지만,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궤변 투성이다. 그는 말로는 아름다운 것보다 선한 것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의 삶은 사뭇 다르다. 반면, 바질은 흔히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괴팍함과는 거리가 멀다. 셋 중 가장 상식적이고 인간적이다. 도리언을 헨리에게 빼앗긴(!) 이후 도리언과 교류가 없던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질을 오랜만에 마주한 도리언은 그에게만은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록,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같이 죽고 말지만. 게다가, 사람 그리고 상황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다. 헨리의 시니컬한 성격이 도리언을 변질시킬까 처음부터 걱정하는 것도 그였고, 시빌 베인의 죽음 직후 아무렇지 않게 공연 관람하는 도리언의 태도를 지적하는 유일한 사람도 그였으며, 여러 사람을 파멸로 이끈 도리언을 걱정어린 마음으로 짚는 것도 매번 그였다. 반면, 도리언은 겉모습과 양심의 부조화를 온몸으로 상징한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그 간극과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연극
도리언이 타락하는 것의 시작과도 같은 사건에 시빌 베인이 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연극 배우다. 그런데 이상하다. 도리언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도리언의 이름도 모른다. 그저 '아름다운 왕자님'이라 부르는 게 전부요, 귀티나는 그의 외형에서 부자일 걸로 지레짐작한다. 도리언 또한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녀의 미모, 그녀가 맡은 다양한 배역에 심취한 것 뿐이다. 대단한 사랑인양 추앙하던 그녀가 친구들 앞에서 형편 없는 연기로 자기 체면를 깎아내렸단 이유 하나로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만큼. 시빌 베인의 엄마 역시 연극 배우다.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소시민의 일상이 아니라 무대 위의 연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도리언의 삶 자체도 연극 같다. 켜켜이 쌓이는 죄악의 흔적을 다락방에 숨겨둔 채,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괴로움은 아편굴에서 털어가며, 늙지 않는 고운 얼굴로 우아한 삶을 평생 연기했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연극'이란 키워드가 연상된다.
필사
p.21 넌 모든 사람을 좋아하잖아. 그 말은 모든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는 뜻이기도 해.
p.32 젊음의 솔직함과 열정에 넘치는 순수함이 그의 얼굴에 있었다.
p.35 사회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도덕의 근간이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종교의 비밀인데 -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인데, 그런데 -
p.60 박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적인 감각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니까요.
p.61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든 존재 이면에는 비극적인 무엇이 있었다.
p.61 그에게 말을 붙이는 것은 섬세한 음의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았다. 그는 활이 건드리고 스치고 지날 때마다 그에 응답했다.....
p.95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잘못 이해하며, 더욱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p.108 어린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사랑함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자라면서는 부모를 판단하게 되고, 때로는 부모를 용서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p.121 낙관주의의 바탕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공포라고...우리가 은행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좌 차월을 받아 낼 속셈이고, 노상강도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주머니가 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라고...나는 낙관주의를 대단히 경멸해.
p.136 정말 매혹적인 사람들은 딱 두 부류야.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아는 사람하고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p.153 사람은 자책을 할 때 나름의 쾌락을 느끼는 법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난할 때 우리는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우리는 비난할 권리가 없다고 느낀다. 우리의 죄를 면제해 주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고백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p.155 당신은 짤막한 경구로 인생을 산산조각 내는데 선수잖아요.
p.182 예술은 예술가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더 완벽하게 예술가를 감춘다고 말이야.
p.183 벌레가 시체에 손상을 가하듯 그의 죄가 캔버스에 그려진 그의 모습에 손상을 가하고 있었다.
p.201 그럴 때마다 그는 죄악의 흔적과 세월의 흔적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흉측한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p.271 잠시나마 그는 이중 생활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p.278 본디부터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거지. 그러니 멋있게 생긴 것 아니우?
p.291 그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 있고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달아나고 싶었다.
p.303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하면 꼭 적이 생기게 마련이거든. 그래서 인기가 있으려면 사람이 그저 평범해야 하는 거라고.
p.311 행복에 겨운 태평함과 즐거움이 안겨 준 지극한 무심함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p.313 도리언, 이 세상에서 무서운 일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권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