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트렁크

by 쑥쑤루쑥

결혼은 무엇인가

스릴러 장르를 잘 못 본다. 호수에서 떠오른 트렁크라니. 우리가 사회면에서 봤음직한 그런 전개가 이어진다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서현진, 공유 두 주연배우, 김규태 감독 이 세 이름만으로 보게 됐다. 영화는 '기간제 배우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토대로 결혼을 되돌아보게 한다.

30년을 알았어도 소통 없이 집착과 연민으로만 근근이 이어지는 부부 정원과 서연. 평생을 원하는 건 손에 넣으며 '수퍼 갑'의 입장으로만 살아온 아내 서연은 부부 사이에서마저 모든 걸 제 멋대로 주무르려 한다. 급기야 남편 정원에게 기간제 배우자와의 계약 결혼 생활을 강요하고, 자신 또한 1년 짜리 배우자와 욕망에 충실한 결혼 생활을 한다. 입만 열면 명령조인 그녀. 그런데 이상하다. 평생을 긴장 속에 살아온 그녀는 1년 짜리 배우자와의 가짜 결혼에서 곁에 와달라는 애원도 해보고 실수도 한다. 그러면서도 정원을 향한 집착을 놓지 못해 정원의 일상을 끊임없이 훔쳐본다. 견과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면서. 무슨 영화라도 보듯이. 그런데, 모든 걸 발아래 두고 통제하려는 서연의 밑바닥을 보고도 옆에 있으려는 지금 곁의 이 남자가 어쩌면 자기보다 자기를 더 이해해주는 사람인 것 같다.

기간제 배우자로 정원과 1년을 살게 된 새 부인 인지. 정원과의 대화는 퍽 사무적이다. 이들은 계약과 매뉴얼로 이어진 비즈니스 관계. 끝까지 둘 사이에 대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인지와의 그 몇 안 되는 대화만으로 정원은 아픈 속내를 꺼내어 보이고, 고질적인 불면증과 약물 의존에서도 서서히 벗어난다. 인지에게는 직업으로 하는 다섯번째 결혼. 지난 배우자들과는 다르게 정원에게 인지 역시 마음이 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준다. 현실에서는 이들의 상처를 헤집는 사람들이 너무도 가까이 있다. 정원에게는 전 부인 서연이, 인지에게는 오랫동안 시달려온 스토커 태성이 있는 것. 정원과 인지는 서로를 걱정하는 한편,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응징하기도 한다. 30년을 알아 온 서연은 이해 못하는 정원의 내면을 비즈니스라 생각했던 인지는 찰떡같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공감한다.

이토록 불행한

등장인물들 중에 정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사가 너무 처참하다. 정원은 돈이 넘쳐나는 집의 외동아들이지만, 엄마를 향한 아빠의 끔찍한 가정 폭력과 엄마의 자살을 겪었다. 엄마의 죽음은 정원에게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렇게라도 엄마가 편해지길 바랬는지도 모를 정도로. 서연과의 결혼에서 마침내 아이가 생기지만, 서연은 아이를 죽여버린다. 심지어 죽은 아이의 초음파 사진 뒤에 약물을 붙여 정원을 조정하려 든다. 이 남자의 인생엔 제 편이라는 게 있을까, 인생의 낙은 차치하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틸까 싶다.

아픔은 인지에게도 있다. 사랑하던 사람과 결혼이 5년전 파토났다. 딸을 위한답시고 딸의 결혼을 손수 파토낸 사람은 인지의 엄마. 그걸로도 모자라 예비 사윗감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린 엄마. 자기 자식을 해하고 마는 어긋난 모성의 피해자다. 어디 그 뿐인가. 예비 신랑은 말한마디 없이 인지를 떠나버렸다. 모든 뒷수습은 인지의 몫이었다. 엄마와 의절한 인지는 친구 둘과 함께 셋이서 가족같이 지낸다. 하지만, 그 중 한 친구마저 수영 중 자살하고 만다. 수영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던 인지의 눈물나는 노력이 친구의 자살로 더는 시도해볼 수 없는 영역이 됐다. 그래도 인지는 꾸역꾸역 물에 간다. 수영을 못하지만 카약을 타고. 이게 끝이 아니다. 손끝이 야문 인지는 공방 수업을 받고, 거기서 스토커 태성과 엮이면서 인지의 불안은 극에 달한다. 저 많은 이벤트들 중 하나만 겪어도 보통 사람이라면 멘탈이 나갈텐데, 인지는 꿋꿋하다. 하지만, 겉 보기로만 꿋꿋할 뿐이다. 인지의 눈빛은 늘 공허하고 얼굴은 파리하며,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계약 결혼으로 만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는 걸로 못 이룬 결혼의 꿈을 이루는 건지도, 의무와도 같은 계약서 상의 도리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건지도 모른다.

운명과 우연

정원과 인지는 사실 취향이 비슷하다. 거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가졌다. 낚시도 못하면서 낚시터에 가서 물을 바라만 보는 정원은 수영은 못하지만 카약으로라도 기꺼이 물 위를 유영하는 인지의 주도적인 면과 비교되는 동시에, 산 장어를 불에다 구워서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 생명을 경시하는 태성과도 비교된다. 인지는 예비신랑이 떠난 집에 있는 어항 속 붕어들을 보살핀다. 자기가 못 갈 때 붕어밥 주는 사람까지 고용할 정도다. 물론, 인지가 그 집을 드나드는 건 붕어 자체보다는 과거에 대한 복잡한 마음에서였을 테지만. 또한, 정원과 인지는 둘다 토마토를 싫어하고, 둘다 제 부모를 혐오한다. 외롭고 불안한 생마저 닮았다. 심지어 이들에게는 전사도 있다(개인적으로는 이 전사가 조금 맘에 안 든다. 그게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 이 작품의 큰 매력이라 생각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내다 버리고, 진부한 보통의 로맨스물로 만들어버린 설정이랄까).

정원과 인지의 결혼 생활은 결국 끝난다. 공감과 갈등, 설렘과 아쉬움이 두루 공존한 채로. 서로에 대한 호감을 알면서도 서로를 잡지 못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서로가 없는 일상을 나름대로 꿋꿋하게 살아내는 중이다. 표정도 집안도 눈에 띄게 환해졌다. 정원 곁에는 서연이 없고, 인지 곁에는 스토커 태성이 없다. 둘은 혼자다. 하지만, 곁에 없어도 늘 생각하는 모습.

정원과 만나며 갖게된 초고가의 트렁크를 인지는 마침내 고물로 처분한다. 날 좋은 어떤 날, 단돈 3,000원에. 그리고 그 3,000원으로 커피를 사먹고 나오면서 우연히 정원을 보게되는 그녀. 두 번 우연히 만나면 그 때는 자기 옆에 있어달라던 정원. 정작 그녀를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지나간다...싶더니, 그 많은 인파를 뚫고 결국 그녀를 찾아낸다. 각자 다른 듯 비슷한 방식으로 과거에 굳게 매여 있던 정원과 인지. 정원이 뒤돌아보는 곳에 이제는 어두운 과거 대신 담담하게 빛나는 인지가 서 있다.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인지가 서 있다. 어색하지만 반가운 두 사람. 계속 마주보고 선 채로 끝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여운이 매우 짙다. 계속 생각난다. 사실은 이 번이 두 번째 우연이 아니냐고, 첫 번째는 계약 결혼으로 만난 거니까!라고 내가 외쳐주고 싶었다. 우주의 기운처럼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꼈으니 또 다른 우연도 결코 놓치지 않을 것 같다.

여백의 미

개인적으로 여백의 미가 많은 작품이라고 느꼈다. 일단 대사가 많지 않다. 어쩌다 호흡이 긴 대사가 나오면 그게 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짧은 호흡의 짧은 대사가 너무 잘 어울렸다. 게다가 음악이 좀 신기하다. 탱고 음악을 서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스릴러스러운 음향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미술 장치들이 눈에 띈다. 파랑으로 상징되는 서연과 빨강으로 대비되는 인지. 바닐라와 라떼처럼, 바다와 구름처럼 믹스 앤 매치로 너무 잘 어울리는 정원과 인지의 의상들. 정원의 정신 상태만큼이나 폐쇄적이고 어두운 정원의 집, 인지가 드나드는 예비 신랑의 옛 빌라도 어둡기로는 만만치 않다. 계약 종료 후 각자 1인 가구로 사는 이들의 집엔 햇빛이 쏟아진다.

한편, 물고기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한 상징이 자주 등장한다. 물고기라면 정원은 낚지 못하고, 인지는 보살피고(가끔 요리도 하지만), 태성은 죽여버리는 존재일 거다. 특히, 인지는 정원과는 생선요리를 나눠먹고, 떠난 옛 연인과는 물고기로 이어진 상태(어쩌면 마음보다 더). 눈이래도 말이 된다. 정원이 제 눈으로 직접 목도한 유년 시절의 짙은 불행, 서연이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정원에게 놓은 덫, 프로페셔널하고 냉정하면서도 온통 외부의 시선과 자신의 욕망 밖에 볼 줄 모르는 서연의 눈, 5년 전 과거로 자꾸만 향하는 인지의 눈. 인지에게 고정된 스토커 태성의 눈까지. 그 모든 게 수면 아래에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두 주연 배우의 연기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말 없는 순간에도 캐릭터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 순간이 많았다. (다만, 공유가 커피를 마시면 카누 광고 같고, 침대에 누우면 가구 광고 같은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정갈한 가르마 헤어와 댄디한 옷마저 도깨비의 김신이 종종 떠올라 버려 아쉽다. 그래도, 애정하는 배우.) 두 사람이 서로의 미래 계획을 물으며 눈물이 차오르는 장면, CCTV 화면으로 상대방을 지켜보면서 안도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장면 등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상당히 많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