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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브 Apr 09. 2022

7. 어색해도 침묵을 지키기

관찰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바닷가에 다녀온 다음날 마리와 시몽과 함께 브레타뉴 Douarnenez에서 옛 친구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Douanrnez는 캥페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는데 캥페르보다는 규모가 작은 매우 아름다운 도시다. 인상적인 바다가 도시 정면에 있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다. 캥페르 보자르 교수님 몇몇이 이곳에 살고 있고 여러 아티스트들과 캥페르 보자르 졸업생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했었기 때문에 유학시절 이곳에 종종 온 적이 있다. 사실 이번 약속이 썪 내켰던 건 아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친구들은 안면은 있지만 만날 때마다 매번 어색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시작할 때 다짐한 게 있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것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만남들과 기회를 피하지 않으리라. 나는 결국 Douarnenez에 가서 친구들과 일박 이일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예전부터 어색한 상황을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는 성격이다. 대화 도중 말이 비거나 어색한 기류가 흐르면 별 이상한 질문을 던져 어떻게 해서든 대화의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성향과 대조되어 내가 최종적으로 되고 싶은 인간상은 적절한 침묵을 대화 속에서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항상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위의 상황을 아우를 줄 아는 사람이며 스스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유학생활 동안에는 어떻게 서든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고 그 안에서 항상 지쳐 집에 며칠이고 처박혀 있곤 했다. 다만 이번에는 어색한 순간에 조급하게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외국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관찰자의 위치를 충분히 느껴보기로 결정했다. 


마리와 시몽과 함께 19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로 가기로 했지만 시간을 착각한 나는 30분 정도를 기다려 홀로 다음 버스를 타고 Douarnenez로 갈 수밖에 없었다. 버스 안에서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할 질문들, 시작부터 별로 좋지 않다. 굳이 이렇게 준비까지 해야 되나. 예전 버릇이 또 튀어나오려고 한다. Douarnenez에 도착해 바로 기욤이란 친구네 집으로 갈 줄 알았지만 마리는 근처 바 주소를 문자로 전달해 주었다. 아마 한잔 하고 집으로 가려나보다. 자연스럽고 즐거운 대화를 위한 가벼운 맥주 한두 잔은 항상 이롭다. 바람을 뚫고 10분 정도 걸어 바에 도착하니 오늘 만나기로 했었던 친구들과 더불어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마리가 준 주소의 바는 예전에 회화 수업을 지도하던 교수님이 1년 전 열게 된 레스토랑 겸 술집으로 Douarnenez에서 꽤나 인기 있는 가게가 되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바에 걸어오는 동안에는 거리에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더니만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부글부글 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기욤, 막성스, 마르고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다. 학교를 졸업한 뒤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막성스와 마르고는 시몽과 마리와 마찬가지로 4년 정도 함께한 커플이고 렌느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기욤은 1년 전 Douarnenez에 4층짜리 허름한 건물을 구매하여 혼자 조금씩 공사를 진행하며 그곳에서 살고 있다. 오늘 하룻밤을 묶게 될 곳은 기욤의 집이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맥주 한잔을 비운 뒤 함께 장을 보러 까르푸에 들렀다. 오늘 해 먹을 음식은 수제 햄버거다. 햄버거 빵, 샐러드, 고기, 야채 등과 아페리티프로 먹을 땅콩, 감자칩, 맥주 그리고 저녁과 함께 먹을 와인을 함께 구매했다. 프랑스에서는 친구들과 수와레를 하면 보통 레스토랑 같은 가게에서 밥을 먹기보다는 친구들과 집에서 음식을 요리해 먹는 게 더 자주 있는 일이다. 레스토랑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부모님과 같이 사는 친구들보다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장을 보고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함께 음식을 요리하는 시간을 천천히 즐긴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춤추고 부어라 마시는 수와레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함께 맛있는 요리를 해 먹으며 대화로 채워지는 수와레가 더 좋다. 


기욤과 시몽 주도하에 만든 수제 햄버거(안에 양파 튀김가루도 있다)

기욤이 만든 햄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21시 정도의 요리를 시작해 22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허기가 진 상태였고 식사 동안 하는 대화의 주제는 햄버거에 대한 것들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와인의 취기가 조금씩 돌자 모두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각자의 주제를 던지기 시작했다. 모두 예술 학교 출신이었으므로 최근 브레타뉴에 있었던 전시들과 젊은 아티스트들의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별별 다양한 각자의 주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프랑스에 돌아온 이유 등과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물론 내 프랑스어 실력은 완벽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거의 완전히 프랑스어를 놓았었기 때문에 모든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대화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프랑스 정치같이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는 그들의 유머를 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2년 반가량의 공백 동안 그들 사이에 쌓인 내가 알지 못했던 사건과 주제들로 대화가 차츰 흘러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내가 이 대화에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좌절하며 이해 못 해도 다 이해한 척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넘기곤 했다.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질문을 해 대화의 흐름을 끊어 버리는 건 한두 번 정도면 귀엽겠지만 아무리 친절한 프랑스 사람이라도 계속되는 질문에는 조금 짜증이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매우 솔직했던 프랑스 친구 한 명은 내가 계속 질문을 던져대자 "넌 어차피 이해 못 할 거야 요즘 프랑스어 공부는 하고 있니?"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 크게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다만 이번에는 억지로 내가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거짓말로 호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잘 알지 못하는 것에는 침묵을 지키고 친구가 "너 이해했어?"라고 물어보면 그때는 "아니 하나도 이해 못 하겠는걸 하하"라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이해 못 했다는 듯 놀란 토끼 같은 눈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찬찬히 듣고 있으면 된다. 그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내가 대화에서 재외 된다고 해도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라면 이해하려 노력해보고 아니라면 한 발자국 뒤로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된다. 정 궁금하다면 그때는 한두 질문 던져보는 것 정도. 이때 침묵을 지키는 순간이 표정은 어떤 표정이어야 할까? 대화 메신저라면 표정에 대해 생각할 필요 없이 간단히 침묵을 지킬 수 있겠지만 모두가 원으로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중 침묵을 지켜야 한다면 그때 침묵을 지키는 사람의 표정은 어떤 표정이어야 할까. 당연히 표정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던지는 문장을 바라보면 된다. 


유학시절 부어라 마시는 수와레를 선호했던 건 나의 어색한 웃음을 보여줄 필요 없이 모두가 술에 절어 춤을 췄기 때문이다. 나는 대화로 시작해 대화로 끝나는 수와레에서는 항상 경직되어 있었다. 단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긴장하며 대답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런 경직된 표정을 스스로 인지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했다. 때로는 내 흔들리는 동공이 보이지 않도록 눈이 감길 정도로 크게 웃어 보이곤 했다. 나는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최근에 프랑스에 돌아오고 나서 크게 깨달은 게 있다면 같은 자리에 같은 순간 속에 있다고 해서 모든 대화에 참여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침묵을 지키면 된다.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다면 굳이 다른 대답으로 둘러대거나 내 의견이 아닌 다중의 의견에 맞춘 대답을 할 필요도 없다. 침묵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은 그 순간에 더 풍부하게 존재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문화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프랑스의 문화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최근 마리와 시몽네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날은 어째서 인지 한두 마디 정도 오갈 뿐 식사하는 내내 아무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쓸데없는 질문을 몇 번 던지다 곧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날 시몽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시몽은 피곤하거나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는 말이 별로 없다. 마리 역시 피곤한 날에는 말이 별로 없는 편이다. 순간 나는 내 존재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은 싫고 그름을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는 친구들이고 그들이 함께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때, 할 얘기가 없을 때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굳이 깊게 침묵의 이유를 파고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침묵은 유용하다. 그것은 화를 내지도 심하게 또는 과장되게 웃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소심하거나 사회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이 침묵을 가질 권리가 있다. 침묵 속에서는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대화와 순간을 관찰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대화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한 발자국 뒤에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침묵은 의견이 없거나 흥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만 의견이 없을 때 침묵이 더욱 유용하기도 하다. 


내가 유학생일 시절 유난히 조용한 친구가 한 명이 있었다. 5년간 그와 대화를 해본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는 어떠한 친구들과도 그룹을 만들지 않고 혼자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왕따였던 건 전혀 아니다. 막상 그와 대화를 해보면 그는 누구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누구와도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드물게 그를 수와레에서 볼 때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날카로운 문장으로 대화를 정리하곤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대화에 중심에 있었다. 그 친구와 더 가까워질 계기는 없었지만 나는 그를 꽤나 존경했다. 내가 되길 바라는 인간상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내가 외국인으로서 이곳에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탤런트는 분명 침묵일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 


Douarnenez의 아침 바다 풍경

Douarnenez의 수아레는 와인의 취기로 인해 1시 정도에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의 비바람은 거짓말같이 사라졌고 맑게 개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일어난 아침 10시, 어젯밤의 옅은 숙취와 함께 멍하니 커피를 한잔 마시고 함께 산책을 나갔다. 조금 걸어 탁 트인 Douarnenez의 아침 바다를 보러 갔다. 해변을 걸으며 조개껍데기를 주었고, 우연히 발견한 숲 속에 사람 얼굴을 한 나무에 조약돌로 코를 붙여 주었고 오래된 집들과 카페들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날 저녁잠에 들기 전 결국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도 많이 불고 어색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Douarnenez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내가 생각한 것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었음에 행복했다. 피하지 않길 잘했다. 마땅한 침묵이었다. 모두가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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