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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브 Mar 29. 2022

6.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우연히 만나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 

프랑스에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캥페르 근처 모든 바닷가 도장깨기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현재 지내는 프랑스 캥페르라는 도시 주변에는 각자 다른 매력과 풍경을 가진 다양한 해변들이 있다. 유학 마지막 연도에 우연한 기회로 가게 된 Île-Tudy 해변은 오랫동안 기억이 남았다. 캥페르 주변 해변들은
작은 마을들을 끼고 있는데, 여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겨울에는 유령 도시처럼 개미 한 마리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하다. 
여름 바닷가의 활발함도 좋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요한 겨울 바다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혼자 해변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겨울의 바다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중 하나다. 


새로운 집에 정착하고 다음날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나 브레타뉴 지역의 해변들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수많은 해변들 중 먼저 버스 시간대가 그럭저럭 맞고 그리 멀지 않으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본 Fouesnant이란 동네에 Beg-Meil라는 해변을 목적지로 결정했다. 12시 15분에 캥페르 역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해 18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여유로운 일정으로 잡았다. 



버스를 타면 좋은 이유는 비교적 가까운 곳이지만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작은 동네들과 바닷가를 지나처 가기 때문에 멋진 풍경을 제공한다. 정원을 야자수와 다양한 식물로 멋지게 꾸민 집들이 보인다. 버스에는 나를 포함 두 세명 정도가 타고 있다. 캥페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기사들은 꼭 라디오를 틀거나 노래를 틀어주는데, 재밌는 점은 각자 노래 취향들이 확고하다는 점이다. 예전에 약 40분 정도의 이동시간 동안 버스에서 하드락을 들을 적도 있다. 앞자석의 마담이 소리를 조금 줄여줄 수 있는지 기사에게 공손하게 묻자 그제야 노래를 바꿔 틀었다. 이번에 만난 버스 기사는 클래식과 재즈를 틀어주었는데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음악의 맛을 더하니 버스에 내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멋진 순간이 되었다.

Beg-Meil는 종착역이었고 그곳에서 내린 사람은 나 한 명뿐이었다. 샌드위치를 싸갈까 고민했지만 새로운 동네를 구경도 할 겸 오랜만에 사치를 좀 부려볼 겸 레스토랑을 가보자 마음먹었지만 종착역 주변에는 열려있는 레스토랑도 흔한 슈퍼마켓도 하나도 없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좀 고프지만 이왕 도착한 거 점심쯤은 거르고 해변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Fouesnant 중심가에서 15분 정도를 걸으면 Beg-Meil에 도착할 수 있다. 걸어가는 길은 사람이 별로 없고 잘 정돈된 집들(maisons)과 작은 숲이 있어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가기에 딱 적당한 거리였다. 

Beg-Meil 해변에 도착했다. 다른 브레따뉴의 해변들에 비하면 규모가 매우 큰 편은 아니지만 해변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적당한 길이의 산책로가 있다. 중간중간 벤치가 있어 다리가 아프다 싶으면 해변을 마주하고 앉아 쉴 수 있다. 브레타뉴 산책로에 재밌고 정다운 점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Bonjour"인사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에게는 매우 어색한 풍경이었는데 이곳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데리고 온 사람, 노부부, 커플로 추정되는 남녀 한쌍, 두 아이를 데리고 온 남자 정도.   

이날은 날씨는 매우 좋았지만 바람이 매우 거세게 불었다. 꽤나 큰 파도들을 볼 수 있었다. 바다 수면 가까이서 나는 새들도 보인다.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와 벤치에 앉았다. 정면 바로 바다 수평선이 보인다. 이 수평선을 보고 있자면 어떤 걱정이 있었던 걸까, 어떤 슬픔이 있었던 걸까 모든 나쁜 감정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늘과 바다를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놓은 수평선은 너무나 완벽하다. 아름답다. 마음이 벅차오른다. 공책과 펜을 꺼내 넘처오르는 감정을 서툴게나마 소박하게 적어본다. 


벤치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다. 해변에 머문 지 두 시간 정도가 되니 슬슬 몸이 으슬으슬하다. 햇빛이 있지만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분다. 몸을 데울 겸 벤치에서 일어나 해변 산책로 끝까지 걸었다. 친구들도 말해줬지만 해변에 오래 있으면 쉽게 피로해진다. 점심도 먹지 않은 채로 너무 걸어서인지 에너지가 바닥이 났다. 이곳도 사람 사는 동네이기는 하니 분명 열려있는 슈퍼 하나쯤은 있겠거니 생각해 결국 해변을 떠나 동네 구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 꽤 오래 서서 해변을 바라보았다. 나는 항상 마지막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곳은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Beg-Meil일수도 있다. 그러니 오래 이곳을 바라봐 기억에 담아두자. 


해변을 뒤로하고 Fouesnant 동네로 돌아왔다. 구글맵에서 슈퍼마켓을 찾아보았다. 조금 멀지만 슈퍼마켓이 하나 있다고 나온다. 뭔가 입에 넣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슈퍼마켓까지 걸으며 동네를 구경했다. 돌로 만들어진 아기자기한 집들과 잘 정돈된 집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어 알게 된 거지만 Fouesnant은 Finistère지역 중  꽤가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파리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들 집을 샀다고도 한다. 


슈퍼마켓에 도착했지만 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동네를 구경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먹고 온 Fouesnant을 바로 떠나기는 아쉽다. 막차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다. 결국 바로 옆에 열려있는 바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끝나 음식 서빙은 끝난 상태였기에 내 선택지는 맥주를 주문하는 것 밖에 없었다. 동양인 얼굴을 가진 키 작은 여자애 하나가 한낮에 바에 들어가 맥주를 주문하니 바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시선을 쏘아댄다. 25cl 생맥주를 한잔 시키고 테라스에 혼자 앉았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던 터라 맥주 한 모금이 정말이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맥주를 두세 모금 더 들이켜자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두 어르신이 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왔니?" "학생이니?" "여기서 뭐하니?" 심심하던 터라 안주삼아 그들과 대화를 해보기로 한다. 

테이블에 앉은 두 어르신 중 한 명은 70세의 조셉, 일명 무슈 시인으로 동네에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외국에 나가 사람들을 돕고 치료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별명답게 무슈 시인은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나를 보고 시를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 옆에 앉은 뤽은 조셉보다 2살 정도 어리다. 그는 Fouesnant에 평생 지내며 어부로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재미 삼아 바다에 나간다고 한다. 조셉은 뤽을 조심하라며 너 같은 소녀에게 매우 위험한 남자라고 계속 그를 Imbecil(멍청한 놈)이라고 불렀다. 

뤽은 자신 인생에 존재했던 3명의 중요한 여자들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자인데, 15살에 사랑에 빠져 10년간 그녀를 짝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죽을 각오까지 했었지만 뒤이어 곧 두 번째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두 번째 여자는 현재 그의 아내로, 그가 40대 정도 되었을 때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여자는 그의 Maîtresse(애인..?)으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으며 현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여인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이렇게 자신의 연애 스토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프랑스 브레타뉴에 지내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중간에 억지로 스톱시키지 않는다면 아마 두세 시간이고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저 없이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 캥페르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나 산책을 하다 갑작스레 나게에 다가와 대화를 건 40대의 마담을 만났다. 현재 자신은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직업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라고 했고 그에게는 17살 된 아들이 있고 3달 후에 애인과 결혼을 하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이어폰을 끼고 혼자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내가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에 물었다. 4분가량의 노래였는데 나는 기꺼이 내가 듣고 있었던 노래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대화를 시작한 지 몇십 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는 작은 종이에 자신의 번호와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동의한다면 내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하였다.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주기로 하였지만 난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하거나 사진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눈은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난 사람에게 주기에는 너무나 깊고 선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 대해 잠시나마 들을 수 있었던 순간에 감사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선한 눈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녀와 함께 대화하는 순간은 그녀의 눈빛만큼 따뜻했다. 떠나기 전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포옹해주었다. 잊을 수 없는 온기다.   

다시 Fouesnant으로 돌아가, 조셉과 뤽의 이야기를 듣던 중 바의 사장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에 대해서 물어봤고 어쩌다 보니 같이 일하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우리는 함께 잔을 부딪히고 노래까지 불렀다. 물론 버스 막차 시간이 다가와 금방 떠나야 했지만 여행자가 가질 수 있는 꽤나 근사한 만남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재밌거나 좋은 사람들만 이곳에 있는 건 전혀 아니다. 꽤나 무서운 시선을 가지고 대화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위의 만남들을 보고 내가 순진한 여행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5년간의 프랑스 유학생활 동안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데어도 보며 나름의 질긴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잠깐 스처지나가는 만남들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과 장소 그리고 그 속에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에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한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관여 할바가 아니다. 순간에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나는 최대한 내가 만난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작은 만남이, 스치는 눈빛이 더 큰 인상을 주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이곳에 돌아오고 그런 우연스럽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맞이하려 하고 있다. 유학시절을 포함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 경계를 하고 많은 벽을 두었는지 느낀다. 타인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게끔 항상 방어태새를 갖추고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나와 맞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그 만남을,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열어주는 것. 그런 순간은 우연히 스치는 만남 속에서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우연히 만난 좋은 인연은 행운과도 같다. 잠깐의 만남이 평생의 대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이 순간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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