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이유
예전부터 화가 나고 속상한 일이 있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글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애초에 내 성격 자체가 남에게 걱정거리를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삭이는 편이기도 하고 5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며 이 버릇은 더 강해졌다.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프랑스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자니 내 언어 수준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분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작은 공책 아니면 휴대폰 메모장이었다. 처음에 나에게 글쓰기란 기분 해소용 정도였지만 점차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고 남기는 데에 의의를 두게 되었다.
대부분 이렇게 남긴 글은 남에게 보여줄 만한 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구 멸망 전에 급히 쓴 유언장 같기도 하고, 거하게 취한 주정뱅이의 주절거림처럼 두서가 없기도 하고 때론 손발이 오글아 드는 감성글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글 모두 삭제하지 않고 저장해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나 할 때쯤 다시 그 글을 읽어본다. 현재의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의 감정을 다시금 새롭게 방문하게 된다. 이불 킥 할 만큼 부끄럽지는 않고 오히려 글 쓰던 당시의 나를 담담히 떠올려보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지 6개월이 되어간다. 시간이 참 빠르다. 최근 프랑스에 돌아올 때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당시에 썼던 두 개의 메모를 감히 열린 공간에 공유해본다.
아래의 글은 프랑스에 떠나기 일주일을 남겨두고 작성한 메모이다.
솔직하게 말해보려 한다
나는 노래를 듣고 싶었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싶었고
오래 걷고 싶었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줄
"혼자를 찾아야 했어"
마른 겨울 넝쿨들을 보고 싶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그 속에
숙하고 눈앞까지 튀어 오르는
감정과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내가 만나
고독이 적당히 채워지면
선한 것을 표현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 글은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메모이다.
나는 납작하게 감정을 눌렀다
튀어 오르지 말라고
이 감정을 마주하면 내 선택을 후회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숨 못 쉬게 납작히 눌렀다
출국장 문에 다가서자 조금 힘이 빠진다
손 흔드는 엄마 언니를 보고 있자니 힘이 빠진다
이 선택에 후회와 두려움이 몰려든다
둘이서 집에 돌아갈 엄마와 언니가 괴롭다 외롭다
비행기가 뜨고 기내식에 맥주 한잔 마시니
이제는 더 이상 누를 힘이 없어
흘러버린다
후지고 촌스러운 보라색 바지가 따뜻하다면서
분홍색 한참 촌스러운 스카프 매고
이모한테 받은 패딩 입은 엄마가 그립고
여리고 불쌍한 언니가 보고 싶다
아 내가 또 떠나는구나
결국 내가 프랑스에 돌아온 걸 후회하게 되었느냐 아니냐를 보기 위해 글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현재를 두고 상황이 좋아졌나 안 좋아졌나를 비교하기 위해서도 내가 과거보다 현재 더 성장했나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루 만에도 다르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그 당시의 감정을 보관해보려는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조금 엉뚱하게도 어떻게 하면 바람을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을 오후 4시에 현관에 흘러드는 바람, 주말 한적한 공원 벤치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뜨거운 해변 파라솔 안으로 불어 든 바람, 여름밤 창문으로 스며들어온 시원한 바람 등. 병에 뚜껑을 열어 바람을 담았다 한들, 바람은 쉬이 희석 대고 떠나간다.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불어 드는 바람일지라도 오늘 불어온 바람은 그전에 불어왔던 바람과 절때 같을 수 없다. 이제 병 속에 담긴 그 당시의 바람은 '이곳에 이 바람이 있었다'라는 개념으로 빈병에 의존해 존재한다.
감정은 바람과 같다.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석 대고 망각되고 쉬이 떠나간다. 오늘 느낀 감정이 전에 느낀 감정과 비슷할 수는 있지만 현재 속에서 불어오는 이 감정은 매번 다른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을 글 속에 간직해보려 한다. 글로 써 내려가는 과정 속에 감정은 이미 희석되기 시작한다. 변화하는 이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감정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글을 통해 상기시킨다. 나는 그렇게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내려 한 수많은 병을 보관해두고 있다. 허우적거린 제스처들을 간직하고 있다. 더 이상 내용물이 없는 빈 병 들일 지라도.
최근에는 자기 계발 열풍이 불며 글쓰기 역시 하나의 수단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 글을 쓰며 자신을 반성하고 부족한 점을 발견해 성장한다는 개념으로.
나에게 글쓰기란 떠나겠지만 다시 흘러드는 새로운 바람에 과거에 지나간 바람을 상기시키는 일과 같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이 잊고 있었던 지나간 감정들이 이곳에 있었지 하며 지나간 다양한 바람의 흔적을 기록해 두는 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 같이 무미건조한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바람의 냄새를 상기 키시는 일. 그리고 다시금 다른 바람을 또 채워 넣는 일.
바람이 분다는 것은 공기의 변화다. 공기가 변하기 때문에 지구의 온도는 고르게 평균적일 수 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지구는 곧 멸망한다. 뜨거운 공기와 차가운 공기의 순환은 생명력이다. 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이 모든 기억 속 뜨겁고 차가웠던 감정의 순환은 우리를 균형 있게 살아가게 한다. 때때로 현재를 살다 보면 바람 한 점 없는 것처럼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시기가 온다. 그때 나는 이 감정을 담았던 글들을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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