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속도

배송 표현이 이래도 돼

by 김현호

당일, 빠른, 새벽, 샛별, 특급, 슈퍼, 번개, 총알, 로켓


이 날렵하고 잽싼 표현 뒤에 붙을 적절한 단어는 무엇일까. 액티브 엑스와 공인인증서의 압박 수비를 뚫고 장바구니에 물건 좀 담았던 사람은 쉬이 짐작하리라. 그렇다. 바로 ‘배송’이다. 빠르다 못해 우주까지 치솟을 기세의 표현은 구입한 상품이 고객 현관 앞까지 얼마나 빨리 도착할지 수식하는 말이다. 뜬금없는 생각이겠다만, 저 표현 중 가장 빠름을 형상하는 단어는 ‘번개’겠다.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를 순 없으니까. (빠름을 표현하는 더 좋은 단어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똑똑한 사람의 말을 빌리자.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신 감응”이라 말했다. 여기에 숟가락 하나 얹어본다. ‘배송은 자본주의적 형태의 정신 감응’이라고. 텍스트로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는 글처럼, 배송의 시간 동안 물건과 주인은 시공간을 초월해 느낌을 주고받는다. 물건은 빨리 좋은 주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 주인은 물건을 무사히 그리고 빨리 받아보고 싶은 마음.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 MD의 마음은 늘 조급하다. 고객이 주문한 상품이 무탈하게, 잽싸게 전달이 되길 바란다. 우리네 일에는 기똥찬 상품도 중요하지만 나사NASA에서 쏘아 올린 로켓 같은 배송 속도 또한 중요 포인트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 <느림>, 밀란 쿤데라



지루함과 느림을 허용하는 게 죄악시 여겨지는 현대의 속도, 우리의 속도를 보며 과거를 반추했다. 과거는 어땠지? 남녀의 감응을 담은 지난날의 기록을 들춰봤다. 구들장 데우듯 진득하고 은근한 속도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면을 발견했다. 과거의 진도(어떤?)는 생각보다 빨랐다는 점. 만난 지 하루 만에 사랑가歌를 부르며 옷고름을 푸는 <춘향전>의 속도와, 만난 첫날 사랑에 빠지고 다음날 결혼식을 올린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아하니 그렇다.


그렇고 그런 현대의 진도(도대체 어떤?)는 의외의 더딘 속도감을 보여준다. 현대의 남녀상열지사에선 이리저리 사람을 재고, 썸을 타고, 시그널을 보내고, 누나가 밥은 잘 사주는지 확인해야 한다. 알아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다. 주차증을 입에 물고 셔츠를 무심히 반쯤 걷어 올리고 조수석 헤드 부분을 자연스럽게 집으며 후진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가 머리를 묶을 때와 안 묶을 때 어떻게 미묘하게 다른지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하나 신경 쓸게 많다. 이러니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현재를 생각하면, 과거의 속도는 새롭고 놀라웁네요)



속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 <느림>, 밀란 쿤데라



사무실의 건조한 BGM 속에서 배송 세팅을 하다 별안간 생각이 사방으로 뻗쳤다. 배송을 표현하는 단어가 달리 보인다. 빠른 배송을 지칭하는 말 중 샛별 배송은 좀 예뻐 보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렇다.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는 상품의 세계를 한 겹씩 챙기며 굽었던 등 주욱 폈다. 느리게 집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속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하니까. 쿤데라 말마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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