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안식처

어쩌다 MD가 된 사람의 일상

by 김현호

그렇다. 어쩌다 나는 MD다.


숱하게 들어왔지만 딱히 실체가 없는 표현이 바로 MD다. 도대체 MD가 뭐야, 라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MD는 머천다이저Merchandiser의 줄임말. 이 표현은 상품을 의미하는 머천다이즈Merchandise에 사람을 지칭하는 어미 -er이 붙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MD는 상품을 하는 사람? 상품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물 건너온 표현이라 그저 눈 껌벅거리며,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는데 생각해보면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도 정의 내리기 모호하다 싶었다. 업에 있어서 정의는 꽤나 중요하다.


MD. 상품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 사람. 굳이 따지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처럼 편집숍의 MD로 특정 콘셉트를 가지고 상품과 브랜드를 가지고 와 고객에게 선보이는 MD도 있고, 한 브랜드의 소속으로 옷을 기획해 생산하는 기획 MD도 있고, 해외 브랜드를 직접 가지고 와 국내 고객에게 판매하는 바잉(buying) MD도 있고, 백화점과 같은 유통 채널과 협업하며 고객과 접점을 찾아내는 유통 MD도 있고, 매장의 내·외부를 꾸며 고객에게 상품과 브랜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비주얼 MD(VMD)도 있다. 늘어놓아보니 많다. 따지고 보면 일상의 모든 구석에 존재하는 상품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을 MD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거시적으로 봤을 때 사회 구성원 모두는 어떤 한 분야의 MD가 아닐까.


이어폰을 꽂았다

집을 나서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귀에 이어폰을 꽂는 일이다. 이어폰 없이 출근하는 길이란 조개 빠진 봉골레 파스타를 먹는 것처럼 의미를 잃는 일이다. 문 닫고 출근길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 이어폰을 잘 챙겼으니 체크 완료. 현실이 들려주는 생활의 소리를 굳이 음악으로 차단해보고자 하는 의식이다.


책 또한 필수. 화려함이 과즙 팡팡 터지는 아이돌 광고 음료처럼 쉴 새 없이 뉴스가 터지는 패션 산업과 잠시 거리를 둔다. 머릿속처럼 엉킨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중 가장 손에 닿기 좋은 책을 가방에 담았다. 그래 오늘은 세계사구나. 언젠가 들었던 팟캐스트 주인장이 추천한 그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를 손에 들고 세상에서 가장 길게만 느껴지는 출근길을 나섰다. 편집숍 MD와 세계사의 조합. 말 궁둥이 가죽으로 만든 코도반 구두를 신고 도심 마라톤을 하는듯한 생경함이다. 하지만 이 또한 허용되는 게 패션 산업 아니겠는가. 치마가 아닌 여성용 승마 바지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샤넬처럼.


출근길 지하철 객실에 몸을 실으며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적 여유를 눈치껏 살핀다. 한 손에 쥔 책을 보며 힐끗 현재 정거장을 확인하는 일도 필수. 멍하니 책을 보다 갈아탈 역을 놓치면 낭패다. 특히 출근길 1분 2분이 아쉬울 땐 더더욱이 그렇다. 아차 하고 내려야 할 남태령역을 지나 선바위역으로 가게 되면 서울과 과천, 과천과 서울 사이를 넘나들어야 한다. 꽤나 고역이다.

50여분 되는 지하철 출근길에 그리스 민주정치와 로마의 민회와 집정관 챕터가 흘러갔다. 몇 십분 만에 백여 년이 넘는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업무 시간도 책장 넘기듯 후루룩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사무실에 도착했다.

가지고 온 책을 사무실 책상 한 구석에 내려놓고 노트북 시동을 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듀얼 모니터 왼편에는 전날의 주문 기록을, 오른편엔 홍보팀에서 스크랩 해 놓은 아침 뉴스를 띄운다. 매출 기록을 살피는 일은 부루마블 황금 열쇠 뒤집는 일처럼 긴장되는 순간. 서울. 서울. 서울. ‘서울로 가세요’가 나와야 되는데 무인도 행이 나오면 그처럼 진 빠지는 일이 없듯, 매출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으면 하루가 고달파진다. 카이사르가 파르나케스 왕을 꺾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준비한 상품과 브랜드 판매가 잘 되었다고쿨하게 말하고 싶은 아침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집에서 회사까지) 왔노라 (매출을) 보았노라 (겨우) 이… 정도야?”라고 꼬리를 내릴 때도 있다. 그렇다. MD의 삶에서 늘 좋은 매출만 있을 순 없는 법이다.


메일함에 매일 쌓이는 일을 하나씩 쳐내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 쭈쭈바 꽁다리처럼 작지만 귀한 점심시간 남은 십 여분 동안 활자로 된 섬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사무실 데스크 구석에 놓았던 책을 펼쳤다. 짧은 시간 동안 책 속에서 몇십 년의 역사가 쏟아진다. 뜨겁고 치열했던 로마의 기록이 몇 줄로 압축되어 나에게 던져진다. 시대의 거대함을 텍스트로 접하고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왔다. 이렇게 다녀오면 루즈했던 업무가 다시 신선해진다. ‘새로움’이 ‘보통’이 아닌 새로울 수 있게 해주는 책이란 존재는 편집숍 MD인 나에게 필수적 안식처다.


다시 상품을 정비하고 스웩(swag) 넘치는 사람들이 만든 옷들을 바라봤다. 어떤 것들이 남고 어떤 것들이 사라질까. 일을 하며 혼자 묻고 답을 찾아봤다. 역시 찾는다고 쉽게 나올 리가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샤넬의 트위트 재킷은 남았고, 여성의 몸을 옥죄던 코르셋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