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상상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이었던가, 아무튼 어딘가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남녀가 단둘이 저녁 식사를 세 번했는데 아무 일 없을 때는 단념하는 것이 좋다고. 우리 오늘 세 번째네요. 어때요? 한번 나랑 더 만나 보지 않을래요?"
시청역에 있는 '오향족발'에서 족발을 먹고 2차로 옮긴 '교동전선생'에서 막걸리 몇 잔을 들이켜고 나는 그렇게 물었다. 소개팅을 하고 세 번째 보는 자리였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음까지는 아니었었지만 소개팅을 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세 번을 만나고 상대가 싫지 않으면 고백한다'고 결정했다. 주선자로부터도 나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다'라는 귀띔도 미리 받았다. 하지만 '사귀자'라는 직설법은 무리였다. 본 적도 없는 일본 노인네의 말을 빌려와 옆구리를 쿡 찌르는 정도인데도 적잖은 결심이 필요했다.
상대의 첫 반응은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여자를 만나면 으레 하기 마련인 '예쁘다'는 칭찬이나 수컷으로서의 어필 같은 것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입에 발린 말은 못 하는 타입인 데다, 목소리에 진심이 담긴 감정을 실어 여자에게 건네 본 적도 없었다. 세 번 중 두 번은 술을 먹었지만, 술을 먹어도 쉬 취하기보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상대를 취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하고 상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보다 5배 이상 밀도가 커진 시간의 호수에 빠져 구명보트의 밧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확히 무슨 밧줄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상대는 긍정의 밧줄을 내려줬다. 그렇게 그 겨울의 어느 날은 우리의 '1일'이 됐다.
남녀가 사귀기로 하고 나서 만나는 것을 데이트라고 한다면 그때 나는 첫 번째 데이트를 하고 나서 집에서 쉬려던 참이었다. 좀 전까지 데이트를 했던 상대에게 (내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과 안방, 형과 같이 쓰는 내 방을 피해 창고로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추웠지만 통화 내용을 들키기 싫었다.
상대는 내가 먼저 전화를 걸 것 같지 않아 자기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첫 데이트 만에 나에 대해 간파를 당한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춥기도 하고 긴장도 돼서 방 안을 쉼 없이 어슬렁거리며 통화를 했다. 10분 정도 지나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30분 정도 지나자 슬슬 휴대폰이 뜨거워졌다. 별다른 용건도 내용도 없이 나도 한 시간이나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