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by 거짓말의 거짓말

가끔 "너는 정말 기억력이 나쁘구나"란 말을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1년 정도 스터디를 같이 한 여자애에게 "넌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냐?"란 질문을 10번 정도 했다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질문을 하면서도 내가 이미 그 질문을 전에 여섯 번인가 일곱 번 혹은 그 이상 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질문에 그 여자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질문을 하는 순간에는 분명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대답을 듣고는 금세 잊어버린다.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외우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린 경우도 있다. 처음에 한 두 달이야 죄송한데 이름을 까먹었으니까 다시 한번만 말해주세요 하고 부탁하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무례인 것 같아서 그냥 이름을 부르지 않거나, 아니면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몰래 물어보고는 원래부터 알았다는 듯이 행동한다.


반대로 가끔 "너는 진짜 기억력이 좋네"란 소리를 듣기도 한다.


어릴 적에 보던 TV 만화 영화의 주제곡을 지금도 50곡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데 만화를 다 보지 않았더라도 대충 대부분의 주제곡을 기억하고 있다. 유일하게 학원에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원 봉고차를 타고 20-30여분을 갔는데, 그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놨던 라디오의 거의 모든 광고와 멘트를 외워서 학원을 가는 동안 실시간으로 혼자 따라 하곤 했다. 어른이 된 요즘에는 예전처럼 기억력이 쌩쌩하진 않지만 그래도 필요한 경우에 가끔 기억력이 제대로 작동해 준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서 그 지인과 했던 과거의 대화나 상황 같은 것을 자연스레 끄집어내는 것이다. 당시에 별다르게 꼭 기억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작은 부분들까지 기억하고 있을 때가 있다.


분명히 내 뇌는 하나일 텐데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어떤 일은 굉장히 잘 기억하고 어떤 것은 그 반대일까. 아마도 그건 제한된 내 뇌의 용량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닌가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 혹은 가장 관심이 있는 정보를 먼저 외운다. 어떤 정보가 들어왔을 때 이 정보는 나중에 필요 없겠다 싶거나, 중요도가 떨어진다거나, 혹은 잊어버려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겠다 라고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판단해 버리면 게으른 내 뇌는 그것을 잘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확실히 남자 이름보단 여자 이름을 훨씬 더 잘 기억하거나, 이 사람은 오늘 만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다 싶은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이름을 외우는데 6개월이 걸린 그 사람은 매번 만날 때마다 앞으로는 다신 만날 일이 없겠지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작은 디테일도 잘 기억하는 경우 등이 그렇다.


여기에 더해 기억이라는 건 기억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도 있지만 '유효기간'의 길이도 중요하다. 이 정보는 어느 순간까지만 필요하다 싶으면 그 순간이 지나면 금세 잃어버린다. 학창 시절, 시험 직전까지 날카롭고 전방위적으로 기억하던 일본어나 한자 같은 수험 과목의 기억들은 시험을 끝마치는 순간 금세 날아가 버린다. 수학 공식의 경우에도 고등학교 때 배웠던 원과 접선의 기울기나, 미분과 적분 같은 개념은 지금은 아예 기억조차 안 난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다시 한번 공부를 하면 처음에 배울 때보다는 빨리 습득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하나도 모른다.


기억도 근육과 비슷해서 한 번 기억했던 것은 나중에 다시 한번 리프레시를 해주면 금세 돌아오긴 하지만 한 동안 쓰지 않으면 금세 작아져 버린다.


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기념일이나, 처음 무언가를 했던 기억 같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의미 있는 해를 꼽자면 1996년, 2004년, 2006년, 2009년, 2011년 정도일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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