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있는 대출이란 무엇일까
"이제 퇴사는 못 하겠네요."
아파트를 매매했다는 나의 말에 직장 상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도비인 나는 이제 평생 대출의 노예가 된다. 3천의 학자금대출도 무서워 월세를 전전했던 나다. 그래서 내 집 마련에 대한 결심도 늦어졌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혹시, 집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용기로 사는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무지성 용기가 아니라 공부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가정한다면 비약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큰 용기를 먼저 경험한 주변인들 대부분이 먼저 했던 고민이었다. 하지만 싱글은 그런 용기를 가질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없었다.
내 집 마련에 대한 자각
행복주택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야 그것이 왔다. 부동산 강의를 들으며 전세사기 경험자들을 여러 번 만나고 나서야 그것이 왔다. 전세사기가 큰 사회문제로 부각된 뒤에야 그것이 왔다. 전세사기 문제도, 내집마련 문제도 항상 존재했던 인생의 중요한 문제였지만. 자각이란 언제나 뒤늦게 오는 법이다.
내 집 마련의 진짜 준비물
내 집 마련의 이상적인 준비물 : 엄청난 목돈, 재력가 부모님, 주식코인 대박 = 이번생엔 불가능
내 집 마련의 현실적인 준비물 : 짜디짠 월급이나마 안정적으로 주는 직장, 성실한 육체, 대출 지식
적게나마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한 사람이라면 적절한 첫 집을 마련하는 게 필요했다. 내가 더 고민해보아야 하는 문제는, 그 '적절함'이었다. 첫 집 마련이 늦어졌고 보는 눈만 높아져서 첫 집을 너무 무리해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었다. '용의 꼬리가 되려 하지 말고 눈을 낮추라'는 부동산 선생님의 조언을 내가 잘 수용해서 결정했는지도 고민이 됐다.
처음 집 사면 드는 생각,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부동산 계약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복잡한 생각들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게 최선일까?'
내게 눈을 낮추라던 부동산 선생님은 자기가 나에게 그런 조언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OO아파트를 계약했다는 나의 DM에 '잘 결정하셨어요'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역시 타인은 내 인생에 큰 관심이 없고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나 자신의 책임이었다.
부동산 유튜버가 처음 집을 계약한 사람을 상담해 주는 영상을 보았는데 그 영상의 내용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처음 계약하면 다 그런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처음 선택이 최고의 선택일 수는 없고 최고일 필요도 없다. 지금의 교훈을 토대로 다음에 잘하면 된다'라고도 했다.
영끌이란 무엇인가
어느 정도까지가 무리한 대출, 소위 영끌일까? 연봉의 10배까지는 대출해도 괜찮다는 의견도 있고, 월급의 30% 정도를 집값 갚는 데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나라 은행에서 나오는 대출로는 영끌이 불가능하다고들 하지만 주담대 상환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무리해서 갭투자를 한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평범한 사람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갑작스럽게 실직을 당하거나 아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등의 변수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금액 : 매매가-시드머니 = 4억
-실수령 월급 : 약 350만원(성과급, 상여금 제외)
-월 대출 상환액 : 약 150만원
-대출 후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월급 : 월급-월 대출 상환액-관리비, 통신비 등 고정지출 = 150만원(.......?)
-결론 : 영끌, 하우스푸어, 성공적(?). 사실은 막막함
고정 대출, 고정 지출을 빼고 나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월급이 절반도 안 되었다. 월급이 매년 조금씩 상승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40년 동안 이렇게 사는 것은 힘든 일,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변수도 있었다.
나는 미혼이다. 내가 사는 집에 들어올 짝꿍이 나타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 집이 첫 번째 집이 아닐 확률이 크다. 계산한 고정 대출, 고정 지출은 갈아타기를 하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문제였다. 집을 이사하는 순간 계산기는 교체된다. 새로운 판을 짜게 된다.
"40년 체증식이고 중간에 집 팔면서 대출 갚으면 되니까."
대출실행을 해준 OO은행 과장님의 말이었다. 물가는 미친 듯이 오르고 돈의 가치는 휴지가 되는 이 나라에서 나는 40년이라는 대출 조건으로 인플레를 헷지 하기로 했다.
결국 영끌의 기준은 다양했다. 내가 생각하는 영끌이란? 인생의 변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반 강제성이 필요한 사람
부끄럽지만 나는 어느 정도 반 강제성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사람들은 매매한 집을 전세 주고 본인은 월세를 살면서 투자에 필요한 시드머니를 모은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만한 알뜰함이 없었다.
내가 월세를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남는 월급도 계산해 보았다. 그 금액으로 했던 과거 투자의 수익률은 은행예금 이자를 크게 상회하지 못했다.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집을 사놓고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나의 능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살다 보면, 정답은 또 바뀌겠지만.
"이제 퇴사는 못 하겠네요."
이 말의 무게는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네. 더 열심히 회사 다니겠습니다."
목표도 영혼도 없이 회사를 다니며 퇴사만을 꿈꾸던 내 마음가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열심히 '반 강제로' 스스로를 관리하며 살아야 했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