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살 때 친구들의 조언을 걸러 들어야 하는 이유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by 낮잠
"1층은 어때? 가격도 저렴하고. 나는 1층이 좋더라."

원하는 아파트에서 원하는 가격의 매물을 찾지 못해 고민인 때였다.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기혼 친구 두 명의 1층 예찬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본인은 1층을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 중에는 1층만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눈치 볼 아래층이 없이 아이들을 뛰게 해 줄 수 있다는 게 참 좋다고.


"하지만 나는 싱글이잖아." 나는 대답했다.

"그래도 가격이 고민이라길래. 1층도 좋다는 걸 말해준 거야."


"엄마도 저층이 좋긴 하더라. 고층은 어지럽고 싫어."

부모님도 저층을 선호했다. 저층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도 아파트 밖으로 바로 나갈 수 있고, 땅과 가까이 붙어 있어서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부동산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매물 말고
팔아야 할 때 잘 팔릴 만한 매물을 사세요."
"본인이 만족하는 매물 말고"

"팔릴 만한 매물을 사세요"

"팔릴 만한......."

그렇다. 장점도 있는 1층의 시세가 다른 층보다 많이 저렴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고민하고 결정해야 했다. 가성비여서 저렴한 거라면 사고, 저렴할만해서 저렴한 것이라면 사지 말아야 한다.




매물의 호가를 협상하며 느꼈다. 이 아파트의 매물은 대체로 매물을 내놓은 사람이 '갑'이었다. 호가를 낮추기를 원하면, 나중에 팔기로 했다며 내놓은 매물을 거두어들이는 집주인도 있었다. 호가대로 매물을 살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집주인도 있었다.


지친 소장님의 말 한마디

나는 저렴한 층도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저층은 인연이 아니었는지, 이상하게 매물을 볼 기회가 나지 않았다. 거주인이 집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다. 저층 매물의 집주인은 이상하게 공인중개사마저도 지치게 한 눈치였다. 중개를 맡은 부동산 소장님은 피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층 매물은 굳이 어렵게 시간 맞춰서 보러 오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이다.


"저라면 몇천만원 더 주고 고층 매물을 사겠어요.
저층은 나중에 팔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요."

이미 소장님의 다른 매물들을 다 보고, 저층 매물 외에는 더 볼 매물이 없는 나에게 소장님은 말했다.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시키는 게 이익인 소장님이 해준 말을 나는 듣기로 했다. 나는 원하는 매물이 나올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부동산에 갈 때는 '지친 표정'을 하라던 공인중개사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이미 많은 매물을 보고 와서 곧 결정할 것처럼, 계약할 것처럼 해야 매물을 잘 소개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 같다. 그러나 나는 미리 손품을 팔 수 있는 좋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조사한 정보로 여러 매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소장님들을 만났다. 척하지 않아도 나에게 좋은 걸 찾아줄 사람을 내가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싱글이라 대출이 X억까지만 나와서 매매가는 X.X억까지만 가능해요. 그 이상은 조정 못 해요.
조정이 안 된다고 하면 안타깝지만 눈을 낮춰서 더 작은 평수의 매물을 볼게요.
가격 조정만 해주시면 당장 계약금 보낼 수 있다고 집주인께 이야기해 주세요.
가격 조정만 해주시면 잔금일과 이사 날짜 최대한 맞춰 드릴 수 있어요.
거주하시는 분은 집주인이고 젊은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생활감이 없는 매물을 선호해요.
엘리베이터 바로 옆 호수, 탑층, 인테리어 공사가 되어 있는 매물, 바닥에 특정 자재를 깔아 놓은 매물은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아요.


누가 보면 부동산 큰 손이라도 되는 양 소장님들을 계속 귀찮게 했다. 부동산 수업 때 조원들과 부동산 거래에 대한 역할극을 하며 미리 예행연습을 해 본 것이 도움이 되었다. 연습 때 했던 바보 같은 말을 실전에서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예행연습은 혼자서도 당당하게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 찾았다. 그동안 본 매물 중에서 두 번째로 괜찮았던 매물을. 원하던 가격보다 덜 깎았지만,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여 계약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팔릴 만한' 무난한 집을 합리적인 가격에 계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내 마음에도 쏙 들었음은 물론이다.


집 살 때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조언을 걸러 들어야 했다. 결혼해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나와는 다른 형편에서 나온 조언은 참고만 해야 했다. 나에게는 현장에서 만난 '지친 사람들'의 말이 중요했다. 지친 공인중개사, 지친 집주인, 지친 매수인. 셋이 만나면 집이 거래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칠 정도가 되었다는 건 결정할 정도가 되었다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은 매물을 보지도 않고 계약하기도 한다는 부동산의 큰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나는 나의 작은 손을 잡아줄 작고 소중한 집을 부지런히 찾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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