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May 10. 2017

호빗들, 드디어 떠나다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25시간

여행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애초에 집 밖에서 자생할 수 없는 집순이인 내가 과연 두 달 동안 밖에서 잘 돌아다닐 수 있을까. 이거 괜히 돈 주고 사서 고생하는 것이 아닐까. 내 몸은 불안감에 못 이긴 나머지 여행 직전엔 잠을 자다가도 코피를 쏟기 일쑤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불안증상은 동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멀끔히 사라졌다. 이제는 정말 무르지도 못하니 불안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 무의식이 동의한 모양이었다.  

침대칸 내부는 의외로 아늑하고 편했다

 배를 타기 전에는 많은 걱정을 했지만 막상 타보니 별거 없었다. 배에서의 시간은 매우 단순했다. 별게 없었다. 3등석 침대칸에서 한숨 자고 출출하니 각자 챙겨 온 햇반에 고추참치 하나 먹고 후식으로 멀미약을 곁들여주면 반나절은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계를 확인해보면 겨우 4시간밖에 지나가지 않은 기막힌 상황과 마주하는 것이다.

 멀미는 견디기 힘들었다. 배에서 이 정도의 멀미를 버티면 아마 기차에서는 웬만하면 멀미도 안 날 느낌이었다. 앉아있기만 해도 파도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울렁울렁 이는 바닥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갑판으로 나가면 멀미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리도 지루한 여행이라니! 나는 견딜 수 없는 지루함에 몸서리치며 늘 멀티미디어에 의존하던 현대인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느리고 재미없는 배에서 아주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와 아직도 해가 붉게 떠있는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광경. 갈 곳을 잃은 낮과 밤의 조우를 구경할 기회는 배를 타지 않고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주 잠시 배를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던 광경이다

 그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 지루한 25시간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 배 안에는 무려 히노끼 사우나가 있는데 아무도 쓸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나와 손양 그리고 하라쇼는 사우나를 하며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오후 2시, 우리는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

 하지만 이땐 몰랐다. 우리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될 줄은. 일단 20KG에 육박하는 짐을 모두 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땀이 비 오듯 내렸다. 우리네 공항처럼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열심히 계단을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착하고 덩치 좋은 러시아 아저씨가 우릴 딱하게 봤는지 대신 가방을 들어줬다. 그렇게 고생해서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험상궂게 생긴 러시아 아주머니가 얼굴 한번 쓱 보더니 여권에 입국도장을 찍어준다. 참으로 간단한 러시아 입성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나름 순조로운 시작이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수속을 마치고 나서였다. 출구가 두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린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우리가 선택한 출구는 주차장으로 나가서 빙 돌고 돌아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가는 코스였다. 분명 다른 출구는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가는 길이었으리라. 역시 난 늘 뽑기운이 없었다.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들을 뿌리치고 20kg의 캐리어를 끌고 모래바람이 이는 비포장도로를 걸으니 영하의 날씨에 땀이 흐르고 후회가 밀려왔다. 우린 왜 이 미친 짓을 시작했을까. 이불에 누워서 귤이나 까먹을걸. 그렇게 계단을 오를 즈음에 강아지를 여럿 몰고 다니던 아저씨가 우리의 짐을 차례로 옮겨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런 게 바로 러시아의 쿨함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프랑스 언니가 프랑스어로 우릴 안심시키고는 짐을 들어줬다. 좋은 사람들..... 러시아.... 은근히 친절한 곳이구나^^ 물론 말투가 거칠고 화난 듯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매우 고급스럽게 생겼다. 당장이라도 무도회를 열어도 어색하지 않을 웅장함이 있었다. 그리고 들어올 때 금속탐지기로 짐 검사를 하기 때문에 매우 안전하고 의외로 도난 위험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역 앞에 있는 마트에서 대충 장을 보고 USIM카드도 샀다.


 직원에게 자연스럽게 "마이끄로 심 까르트 빠좔스따(마이크로 심카드 주세요)"라고 외치니 친구들이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눈빛은 그 실력이 금방 들통나서 오래가질 못했다.    


 유심카드를 연결하여 핸드폰이 드디어 문명과 연결될 때 느끼는 안정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겨우 한국을 떠난 지 이틀째였지만 한국 소식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편해졌다. 이젠 캐리어만 기차에 잘 태우면 되겠구나. 그때 시간이 벌써 오후 5시. 오전 6시에 밥을 먹은 이후로는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가 무거운 짐을 이고 블라디보스토크 일주를 하고 나니 머리가 뱅뱅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까사(매표소)에 가서 표를 바꿔야 하는 상황! 폴란드로 넘어가는 국제기차표까지 바꾸느라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러시아어로 설명하는 아주머니의 말을 눈치껏 알아듣고 싸인도 하고 졸졸 따라다니며 국제기차표도 받느라 없는 기운을 쥐어짜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다렸다. 그래도 한 시간이면 빨리 끝났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시베리아 횡단열차표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우린 역 앞에 있는 공공식당에 가서 삶은 감자와 고기볶음을 먹었다.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맛있었다. 뭔가 러시아 음식은 친근한 맛이 있다. 마치 할머니가 겨울에 따땃하게 부쳐주는 감자 지짐이 같은 맛이다. 강원도 음식에서 느껴지는 삼삼하고 기름진 감성이 있다. 다만 김치가 없을 뿐이지. 알 수없이 익숙한 묘한 맛이다.


 이제 새벽까지 기다려서 기차를 타면 된다.... 우리 제대로 탈 수 있을까?


TIP

블라디보스토크 역에는 물품보관소와 샤워장 그리고 휴게실이 있다.
물품보관소는 러시아어로 '카메라흐라녜니야'다. 카메라를 생각하면서 기억하면 된다. 1층 로비에서 매점을 지나면 바로 물품보관소가 있다. 보관료는 가방 하나에 100 루블 정도 받는다.
몸이 찝찝하면 샤워도 할 수 있다. 1인 전용이며 수건과 세면도구는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샤워는 200 루블-300 루블 정도. 러시아어로 샤워는 '두슈'다. 못 알아들으면 샤워하는 시늉을 하면 된다. 바디랭귀지만 한 게 없다.


작가의 이전글 타이밍, 우리의 운이 맞닿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