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여러분
붉은색.
그 친구를 생각하면 빨강과 주황 사이 머리칼이 생각난다. 학교 복도를 걷다가 마주한 순간 그 애는 풍경에서 튀어올라 내 마음에 통통 뛰어들었다. 붉은 단발머리를 넘겨 포마드로 단정히 정리한 모습이 그 친구에게 아주 걸맞다고 생각했다. 자유분방한 듯 정제된 모양새는 겉모습뿐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수용적인가 싶다가도 할 말은 또렷하게 할 줄 아는 심지 곧은 아이였다. 대단한 멋쟁이였다.
J는 나와 많은 얘기를, 웃음과 눈물을 나눴다. 남들에게 털어놓기 뭣한 이야기도 아무런 계산 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졸업을 앞둔 즈음에 우리는 교내 카페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커피를 마셨다. 그곳의 커피는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J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과, 언제나 포옹으로 작별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J는 의자에 무릎을 접어 올리고 몸을 느리게 흔들대는 습관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럴 땐 한결 진지해 보였다. 나는 그 표정을 애정했다. 그건 J가 집중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내 말에 집중했다. 하늘이 어슴푸레해질 때면 J는 알바를 하러 떠났고 우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면서 늘 다음엔 맛있는 뭔가를 먹자고 약속했다. 언제나 다음이 있던 친구.
다음이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사람을 안심하게 만드는지. J는 악의를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으로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곤 했다. J 앞에선 남들에게 잘 하지 않는 이런저런 얘기를 자꾸만 한 바가지씩 꺼냈다. J는 고요히 들었다. 가끔은 큰 눈에 눈물을 찰랑찰랑 담고 있었다. 그 애에게 인생은 함구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타인의 짐이 될까 봐 불안해했다. 나는 J의 불안함을 ‘무쓸모한 걱정’이라는 둥 ‘과한 자기 존재감’이라는 둥 놀려댔다. 그러면 J는 푸하하 웃었다. 웃는 모습에 뿌듯했고 안심했다. 언제나 다음이 있다고, 언제나 만나서 웃겨줄 수 있다고.
J가 생각나면 아직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했던 말들이 정말 그 애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그 애 마음을 더 혼란하고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너무 많이 흘렸다. 내 마음에만 담아두고 쑥스러워서 꺼내 보여주지 못한 말이 많다. 내가 얼마나 애정했는지, 나눈 얘기 하나하나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내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목요일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같은 것들을.
노란색
우리는 주로 학교 근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같이 어딘가로 놀러 간 기억은 손에 꼽는다. 언젠가 우리는 드물게 혜화 대학로의 카페를 갔었다. 먼저 도착한 J가 있던 카페는 커피와 꽃을 파는 곳이었다. 노오란 꽃다발 옆에 앉아있던 J는 생기가 넘쳤다. 그날 우리는 눈물이 날 만큼 정말 많이 웃었다. 웃느라 기운이 빠진 우리는 노을이 깔릴락 말락 해서 공기까지 노랗게 느껴지던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요즘도 길거리 가판대에 놓인 노란 꽃다발을 보면 내가 잃어버린 우리가 많이 생각난다.
나는 언제나 늦었다. 어느 날엔 수업이 늦게 끝났고 어느 날은 버스를 놓치고… 셀 수 없이 많은 약속에 5분, 10분씩 늦었다. J는 단 한 번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 놓고 늑장을 부렸던 건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이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늦은 순간만은 잊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J의 먼 여정은 해가 산등성이를 게으르게 넘어가며 황혼을 뿌릴 때 내게 도착했다.
J의 환한 사진 앞에서 상실감보다 답하지 못한 메시지, 죄책감과 원망을 먼저 느끼는 내가 미웠다. 또 그즈음에 나를 힘들게 하는 타인들을 원망했다. 내가 진실로 원망한 건 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 돌이킬 수 없게 된 건 나의 행동 때문이란 걸 깨달았을 때. 나는 J의 아픔보다 내 아픔이 앞섰다. 끝까지 그랬다. 이기적인 마음은 나를 더 아프게 찔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리는 복도에서, 억지로 그 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발걸음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 발이 멈추면 마주해야 할 현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렇지만 걸음은 속절없이 가야만 하는 곳으로 닿았다. 닿지 못한 건 J에게 꺼내주지 않은 내 말 뿐이었다.
이제야 솔직해진다. 나는 너를 참 어여삐 여겼더라고. 산길에 툭툭 터지는 밤송이처럼 웃던 모습이 좋았다. 웃는 얼굴이 너의 전부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게 대부분이길 바랐다. 욕심이었다. 기막히게 늦은 내 말과 마음이 차가워진 바람을 타고 너에게 닿길 바란다. 무릎을 접고 앉아 바람을 타던 너는 천국에서도 그러고 있니? 네 모습이 사진처럼 눈에 선하다.
마지막 약속
꽃이 노랗고 붉게 피어날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생각한다. 너는 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네 개의 계절이 두 번 넘게 지났다. 울고 싶으면 울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이야기하면서 괜찮아졌다.
이 글을 쓸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한 줄을 썼다가 지우고 한 문단을 완성했다가 또 지우고 몇 번을 다시 시작했다. 하찮은 솜씨로 아물지 못한 여럿의 마음을 섣불리 건드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여러 날의 고민 끝에 마침내 쓰기로 했다. 여전히 너는 내 삶에 스며있는 친구니까. 나는 약속에도 늦었고 연락에도 늦었고 지키지 못한 약속을 많이 말했다. 이제는 지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약속을 전한다.
친애하는 J에게. 오래도록 너를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