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여러분
언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N은 세 학번 밑의 후배다. 바로 밑 학번이라면 모를까, 세 학번이나 차이나는 후배와 이토록 가까워질 줄은 몰랐다. N과 나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N은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술도 잘 안 마시고, 교회 일과 집안의 일로 바빠서 학교에서 잘 볼 수 없는 애였다. 가끔 술자리에 앉아있을 때도 눈에 띄는 애는 아니었다. 활달하고 시끄럽게 노는 부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에게 넉살 좋게 말을 붙이는 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N과 가까워진 이유는 단 하루의 공강 덕분이었다.
3학년의 나는 수강신청을 완전히 망했었다. 오전 9시에 수업을 듣고 공강 세 시간을 견뎌야 했다. 공강 때 나는 주로 카페에서 농땡이를 부렸지만 그날따라 과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과방에는 N과, 굉장히 활달한 N의 동기 한 명이 있었다. 애초에 여학우가 적은 과였고 몇 안 되는 여학우들은 휴학 없이 빠른 졸업/취준으로 사라진 탓에, 휴학을 두 번이나 하고 복학한 나는 ‘대 여선배’에 속했다. 대선배에 걸맞은 도량을 갖추어 나는 으레 후배들에게 하던 인사를 건넸다. 얘들아. 밥은 먹었니?
나는 선배들이 말을 걸면 어버버 대답만 겨우 하고 어색한 미소와 사라지는 애였다. 선배들이 어색해서 그랬다. 당연히 그들도 그럴 줄 알고 말을 붙였는데 우리의 대화는 매끄럽게 순항했다. 알고 보니 N과 나는 같은 전공 수업을 듣고 있었다. 우리는 교수님들, 같이 수업 듣는 학우들을 이야기했다. 신난 나는 농담을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이 ‘꼰대’를 싫어하는 이유엔 분명 재미없는 농담도 있을 것이다. 그의 농담이 재미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한결 더 싫어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도 무리수를 던졌다 싶었을 때, N은 장난스러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언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그 순간 나는 N이 정말 좋아졌다. 세 학번. 많아 봐야 서너 살 차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 차이는 별 것 아닌 게 되어가지만 학교 다닐 땐 천지에 비견할 차이가 아니던가. 아닌 걸 아니라고, 재미없는 걸 재미없다고 세 학번 위의 선배에게 말할 수 있는 N의 용기가 좋았다. 그건 대단치 않은 일이면서도 대담함을 요하는 일이다. N은 누구에게든 진실한 사람일 것 같았다. 나는 진실한 사람에게 약하다.
N, 우린 분명 재밌잖아
N은 타고나길 부드럽고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적당한 위트까지 갖추고 있다. N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크게 호의적이진 않지만, N은 '좋은 기독교인'의 표본이었다. 전도를 강제하지 않고 배려가 넘치며, 조금 웃기고,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이야기를 들어주곤 뒤에서 조용히 기도해주는 사람. 내가 힘들고 지칠 때 N과 대화하면 어딘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날 위해 기도해줄 거란 사실을 알았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를 믿진 않지만 나를 위해 누군가 기도한다는 사실은 꽤 괜찮은 사실이다.
언젠가의 N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충격적인 상실 속에 헤맬 때였다. 적막을 견딜 수 없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는 N의 전화를 받았다. N은, 괜찮냐고 물었다. 그다음엔 그 애가 괜찮았을까, 물었다. 빈소가 너무 작고 입구 쪽이라 추웠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N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힘이 있어서 나는 비로소 눈물을 흘려보낼 힘이 났다. 우리는 축축한 목소리로 같이 조금 울었다. 그날의 N의 목소리를 늘 되새긴다. 그후의 나는 N이 방송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N과 재회했을 때 N은 여전히 부드럽고 고요했다. 잘 웃었고 다정했다. 나도 개의치 않던, 내게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의 세기를 세심히 손을 대보며 걱정할 만큼. 이런 식의 습관적인 다정함은 곤란한데. N의 호의를 특별한 무언가로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겠다. 그건 너무 다정한 N의 탓이다. 중죄다.
N은 여전히 목소리가 좋았다. N은 팟캐스트를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했다. 과방에서 한 순간에 N이 좋아져 번호를 달라고 했던 때처럼 나는 열심히 N을 꼬드겼다. 우리는 어색한 첫 녹음을 했다. 녹음을 계속 했다. 다른 친구 하나를 열심히 꼬드겨 영입했다. 우리 방송의 마스코트를 만들었다. 서른 개가 넘는 에피소드를 올렸다. 방송에서 N은 문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말을 한다.
N은 자신이 우리 방송에 필요한 사람인지를 필요 이상으로 자주 고뇌한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법 없이 말하는 N이 없으면 우리 팟캐스트는 팥 없는 팥빵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N, 다 떠나서 우리 정말 재미있잖아. 그거면 좋잖아. 그러니 너의 지나친 다정함에서 비롯하는 중죄를 용서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