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여러분
늘 화가 났다
B와 나는 체온보다 낮은 발화점을 가졌다. 발화점이라 함은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하는 최저 온도를 이른다.
B와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많았다. 우리는 자타 불문 사람을 몹시 사랑하고 또 몹시 미워했다. 사랑과 미움은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너무 사랑하는 우리의 친구들이 손쉽게 상처 입는 게 화가 났다. 상처 받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해줄 것이 없다는 게 무기력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사람들에게 주석을 달았다. 미움. 나 쟤 싫음. 우리의 주석은 늘 물음표로 이어졌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좋음과 싫음이 어떻게 늘 정당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없단 걸 알면서 어린 우리는 어리석게 이유를 찾아 헤맸다. 호, 비호, 불호의 딱지에 합리적인 이유를 붙이려고 젊음과 눈물을 낭비했다. B와 나는 정당성 없는 미움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종종 B에게, B는 종종 나에게 물었다. 나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질문 받은 사람은 대답해 주었다. 그럴 수 있지. 이건 지금도 우리가 종종 주고 받는 대화다.
우리의 마음을 긁는 여러 말과 사건들, 사람, 사람의 생각...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화나게 하는 건 우리 자신이었다. 어리석은 결정을 할 때마다 우리는 쉽게 비난하던 타인보다 더 신랄하게 스스로를 욕했다. 우리가 싫어했던 그 어떤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못 견뎌 했다. 아무도 모를, 그러나 스스로는 또렷하게 아는 은밀한 못난 생각들이 미웠다. 자신에게 화가 치밀곤 했다. 자신이 가엽기도 했다.
세상의 누구에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는 것이 사랑 받지 못함과 동의어인 줄 알았던 20대 초중반의 우리는 각자의 찌질함을 겨냥한 분노를 장작 삼아서 술을 마시면 가끔 울었고 그보다 드물게 커피를 마시다가도 울었다. 스스로를 미워는 해도 보다 사랑했다면 그렇게까지 울며 보내진 않았을 텐데.
초코 수액에서 드라이브까지
B와 나는 단 걸 좋아했다. 겁도 없이 케이크, 아이스크림, 쉐이크를 우물대면서 폭탄 같은 칼로리 돌리기를 했다. 커피와 디저트만 가지고도 3차, 4차까지 갈 수 있었다. 남들이 연 단위로 걸쳐 먹을 디저트를 먹어대면서 "한 오십 년 뒤에 입으로 먹을 수 없게 되거든 초코를 수액으로 맞자"고 농을 던졌다. 그건 B와 나의 은밀한 애정의 확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너는 여전한 친구로 남아줄 거지, 나는 너의 인생에 남아있고 싶어, 같은 류의 감상적인 확인.
열한 시의 통금을 지키려 최선을 다해 음주 속도전을 치러내던 B는,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겠느냐며 토로하던 B는, 사람이 너무 싫은데 너무 좋다고 같이 울부짖던 발화점 낮은 나의 B는, 무언가가 되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되었다. 우선 어엿한 다년차의 직장인이 되었다. 일터에서 사건이 터지면 '제엔장 미치겠잖냐' 따위의 요상한 맞춤법으로 카톡을 툭 던지곤 씩씩하게 해결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울먹거리며 운동을 간다. 책을 많이 읽는다. 블로그도 몇 년 째 쓰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을 너무 싫어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근면하고 멋진 어른이 되었다. 화는 여전히 많다.
우리는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어른스럽다의 완벽한 정의는 모르겠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어른스러움'은 그때는 못하던 것들을 지금은 하게 되었음을 이른다. B와 나는 연말이면 드라이브를 간다. 둘 다 차는 없지만 내 쪽이 '초보 중에 베스트 드라이버'로서 그럭저럭 운전을 하고, 둘 다 기분 내는 데에 덜 인색해졌다. 일년에 한 번쯤은 카쉐어링에 돈을 좀 써줄 수 있다. 한 번은 김포를, 또 한 번은 양주를 갔다. 몇 년 더 지나면 우리 중 누군가는 차를 사겠네. 자차로 드라이브를 가게 되겠네. B는 올해 그런 말을 했다.
우리의 연말 드라이브가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내가 물으면 B는 언제나처럼 답해줄 것이다. 그럴 수 있지. 우리의 화가 없어지는 날이,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는 날이 올까? 물으면 B는 답할 것이다. 그럴 순 없지. B와 나의 발화점은 계속 체온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미움을 데려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