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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May 22. 2024

운동 글쓴인데 마비로 당분간 운동 금지 당했어요

이걸 운동 일기에 넣는 게 맞나

   갑작스러운 마비

   어제는 준비하는 시험의 최종 정리 강의 시간이었다. 듣고 있는 수업을 마치면 마지막 한 교시만 남은 상태였다. 강사는 특강이 종료되면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과 어색한 이야기를 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쪽 팔이 너무 저렸다. 피가 좀 안 통하나? 양팔을 들었다 내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데 저림은 계속 심해졌다. 저리다 못해 날카롭게 아프기까지 했다. 40분 가까이 증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재밌게 듣던 특강에서도 정신을 빼앗긴 채로 나는 두 팔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주물럭거리는 등 부산스러워졌다. 결국 새로운 사람을 향한 기대감, 특강 완수의 뿌듯함 따위를 몽땅 포기하고 쉬는 시간에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신경외과로 향했다. 이미 시간은 오후 여섯 시를 넘긴 상태. 접수를 받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대학 병원에 가서 무한 대기라도 해야 하나? 대학 병원의 대기를 고려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다. 이제 두 팔엔 감각이 없었다. 전에 아빠가 이런 식으로 쓰러져서 뇌경색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뇌 관련한 문제는 아니지만 내게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척골성말초신경염을 진단받았던 그때는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 맥주를 마셨을 때만 양손이 저린 정도였다. 이렇게 팔꿈치부터 손가락까지 넓은 범위가 저린 적도, 저림이 날카로운 고통과 마비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신경외과는 접수를 받아주긴 했다. 다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검사를 진행할 수는 없다고 했다. 손과 팔이 가눠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죽 빠진 게 아니면 뇌 이슈일 확률은 낮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물리치료와 이틀의 약 처방을 받았다.


   젊고 술도 잘 안 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약 먹고 물리치료하는 것 말고는 실질적으로 조언해 드릴 게 없는데요. 일단 약 먹고 물리치료받읍시다. 운동은 당분간 쉬세요. 얼마나 쉬어야 하나요, 묻자 그는 속쌍꺼풀이 진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피곤해도 참고 운동 가죠? 그러면 안 됩니다, 원래. 얼른 물리치료 가세요.


   말문이 막힌 채 자리에 후끈한 전기장판이 깔린 물리치료실에 누웠다. 물리치료실 선생님들은 친절했다. 안심하라고, 싱긋 웃어주며 커튼을 닫았다. 커튼을 닫아 혼자가 된 곳에서 가늘게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를 닦았다. 한 번, 두 번. 또 한 번. 나 오늘 계획한 거 많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어떡해? 병원은 나으러 가는 곳인데 동시에 절망적인 진단을 받는 곳이기도 해서, 이상하게 사람을 압도한다.


   그래 뭐 언제는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더나

   입시할 때가 생각났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그렇듯 나도 내 본래의 계획과 많이 다른 수험 생활을 보냈다. 생각보다 더 오래 공부했고 생각도 하지 않은 학교, 과에 진학했으며 생각보다 훨씬 더 공부를 못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대체로 재밌었다. 태어나서 언제 또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볼까(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싶은 사람들, 언제 또 이런 걸 깊게 파볼까 하는 수업들, 토론들, 원문들. 순진한 폭음으로 이어지던 농활과 답사, 기타 여러 경험들. 그 모든 것은 계획된 적 없었다. 지금은 그 학교, 그 과 출신이 아닌 나를 상상하기 어렵다.


   결국 수차례 깨닫고 망각해 버렸다시피, 계획은 전혀 다른 것으로 탈바꿈하기 마련이다. 내 삶은 내 거라고들 말하지만 온전히 내 계획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여러 우연과 사건사고들이 괘씸한 칼치기를 해버린다. 나는 별 수 없이 멈추었다가 천천히 가거나, 차선을 바꾸거나. 슬픈 상상만 하면서 절망하면 어쩌겠냐고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괘씸한 칼치기 사고를 통해야만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요.


   어제저녁의 두 팔 마비 소동으로 내 모든 일정은 중지됐다. 들으려던 특강과 참석하려던 식사 외에도 잔뜩 쌓아뒀던 할 일들을 모두 다이어리에서 지웠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편하기도 하다. 어차피 계획대로 훌륭히 이어지는 게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면 며칠의 느린 뒷걸음질도 나를 도착 지점에 데려다 놓는 과정일 것이다. 아침에 700미터 남짓한 카페에 걸어 나오면서, ‘나에게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못 본 체하던 피로가 꽝꽝 느껴졌다. 오래는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운동을 쉬고, 나를 잘 케어해 줘야겠다.


   오늘은 그간 미뤄온 표피 낭종 수술을 할 거예요. 동생과 맛있고 비싼 딤섬과 디저트를 먹을 거고, 여름을 위해 준비한 멋진 옷을 교환하고 저녁엔 중국음식을 건하게 먹을 거예요. 다들 저를 교훈 삼아서 피곤할 땐 운동을 쉬세요. 일상을 쉬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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