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앞 밤바다는 파도가 높았다.
바람이 멱살을 틀어쥐고 모래사장에 주저앉히는 듯한 거친 모양새로 파도는 굽이쳤다. 파도의 소매 끝은 사람들의 얼굴을 언뜻언뜻 건드렸다.
얼굴을 닦으며 모래사장에 둘씩, 셋씩, 넷씩 앉아있는 사람들은 홀린 듯 파도를 구경했다. 나는 둘씩, 셋씩, 넷씩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과 멀리서 간헐적으로 반짝이는 등대를 보고 있었다. 등대를 볼 때면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뻗던 개츠비를 생각한다. 나는 뭘 기다리길래 등대에 시선을 빼앗기는 걸까.
열 시가 되자 해수욕장 모래밭을 환히 비추던 조명은 거의 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바다를 볼 뿐이었다. 되려 달가운 방문객을 맞듯 사람들은 들고 있던 맥주를 짠하기도 했다. 웃은 이들의 이가 상아빛 조개 목걸이처럼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가족 여행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빠 우리 이제 뭐 해? 하던 어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이제 엄마아빠가 우리 이제 뭐 해? 하고 묻는다. 아마 운전도 내가 도맡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정말로 오고 마는 건가? 아직 난 그런 책임을 질 준비는 안 됐는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명이 꺼져 한결 시커멓고 무서운 파도를 구경하며 걸었다. 머리에선 짠내가 나고 운동화엔 고운 모래가 흘러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우리는 체크아웃 후 한 번 더 바다를 구경했다. 전날 본 바다였지만 오후의 바다, 밤의 바다, 낮의 바다는 제각기 다른 물보라를 뽐냈다. 어쩐지 통통한 갈매기들은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날았다. 다섯 식구는 제각기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불쑥 말했다. 엄마, OO이 기억해? 나는 걔 정말 싫어했다? 왜. 걔 착한 애 아니었어? 맞아. 근데 그때 엄마가 하도 걔랑 비교해서 나는 걔가 정말 싫었어. 엄마가 그랬어? 난 기억이 없는데... 엄만 기억 못 해도 나는 다 기억해.
평온한 어조였다. 화를 내지 않고 이토록 평온하게 엄마에게 싫은 이야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지난날에 관해서는 침묵 혹은 고성만 오가던 모녀 관계였다. 이번엔 엄마도 참았고 나도 참았다. 우리는 잠깐 침묵하다가 차에 올라타서 다시 쓸데없는 농담을 했다. 엄마한테 싫은 소리를 다 하다니. 왠지 마음이 이상했다.
집에 돌아가면 동네에서 파격 할인을 한다는 골프 레슨장에 등록을 해야지. 배웠는데 재미없으면 그만둬버리지. 그다음엔 테니스를 배워보겠어. 기분이다, 테니스는 엄마를 껴줄 수도 있고. 재밌는 거 하고 살 거야. 엄마한테 억울했던 거, 싫었던 것들 한소리도 하고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