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그럴 수 있다면
가끔 생각한다. 내가 훌쩍,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좋은지 싫은지 더듬어 본다. 잘 모르겠다. 어릴 때 비하면 너무 건조해진 것 같다. 하나하나의 일에 크고 깊고 오랜 상처를 내지 않는 건 '성숙'이라 부르는 쪽이 좋으려나. 어린 나무가 큰 나무가 될수록 껍질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어린이가 어른이 될수록 무뎌진다. 그래서 지나는 바람도 뺨에 상처를 낼 수 있던 말랑한 날이 그리워지나 보다.
불안하다. 불안했다,라고 종지부를 찍고 싶다. 좀처럼 과거형이 되지 않는 불안을 체념하듯 입양하는 게 성숙의 면모일지도 모른다. 성숙에 발을 담글까 말까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 안 불안한가? 결혼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안 불안한가? 물려받을 게 많으면 안 불안한가? 어느 날엔 나 빼고 아무도 불안하지 않은 것 같다. 외롭다.
그건 내 착각. 저 사람만은 결코 불행할리가, 불안할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어느 날 불쑥 성긴 고백을 던진다. 난 너무 불안해. 나 정신과 약 먹고 있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밤마다 목구멍이 터져라 음식을 처먹고 있어... 그런 날은 나를 비롯해 모두가, 지구의 모든 인류가 불안한 것 같다. 내가 별종이 아님을, 모로 누운 안도감을 느낀다.
또 어떤 날에는 대책 없는 용기가 솟는다. 내 인생에 불안하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어. 불안한 거 뭐. 인생 망가지면 뭐.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야. 이런 류의 말을 남에게 하면서 내 귀로 듣는다. 남의 것처럼 들리는 담대한 말. 이 말에 든 용기가 오래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하는 나도 알고 듣는 사람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일단 안심한다.
내 말이 지붕이 되어줄 수 있었다면. 아니, 지붕은 너무 과한 비유다. 잠깐의 추위를 이겨낼 덮을 것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거다. 서로의 불안을 씨실 낱실로 엮어 이불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밑에서 잠시 이슬과 우박을 피할 수 있다면. 그 애는 죽지 않았을 거고 저 애는 진작 일상을 되찾았을 거고 나는 진작에...
오류와 일탈을 사랑해
진작에,라는 말이 들어가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들을 튕겨낸다. 암기하며 자라난 인간은 정답을 좋아해. 저도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답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나에게, 남에게 자꾸 인생의 정답 같은 것을 되찾아 주려고 한다. 진짜 해야 할 질문은 놓친다. 사는 데 정답이 있나?
나와 내 수많은 친구들은 어른들, 그러니까 나도 어른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어른들'이 싫어할 모든 것을 갖췄다. 술을 많이 마신다. 과반수가 담배를 태운다. 반의 반 정도는 크거나 작은 문신이 있다. 다들 정신과 상담의 이력이 있다. 밤이면 슬퍼서 울다가 눈물 대신 술을 퍼올린 애, 담배 연기를 공장 굴뚝처럼 내보낸 애, 침대에서 꼼짝도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던 애, 자기 몸을 꼬집고 뜯은 애... '나보다 훨씬 더 어른들'이 쯧쯧 혀를 차고 바로잡으려는 행동들. 실수, 혹은 일탈, 혹은... 뇌의 오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우려를 덜어주고자 미리 말하자면 대다수가 뇌의 오류 따위를 잘 다스리고 다독이며 건강하게 지낸다. 더 이상 눈물도 술도 푸지 않게 된 애, 담배를 끊은 애, 침대에서 나와서 매일 크로스핏이니 소모임이니 가는 애, 몸은 괴롭히지 않고 손톱만 조금 뜯는 애가 되었다. 비결? 음... 서로 불안을 맞대고 푸념하고 울고 한숨 내쉬듯 연기를 뿜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누가 '난 너무 병신 같아', 말했다.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다른 애가 답했다. 그래도 사랑해. 그때부터 우리 뇌가 고장 난 애들의 유행어 자리를 꿰찼다. 그래도 사랑해. 죽고 싶어도 사랑해. 오후 세 시까지 밥도 안 처먹고 누워만 있어도 사랑해. 또 잔뜩 상처 냈지만 사랑해. 하루에 한 갑 넘게 담배를 피웠다고? 그래도 사랑해. 술 좀 그만 마셔, 그래도 사랑해. 사랑 폭격에 소름 끼쳐하던 것도 잠시, 우리는 점차 그 "사랑해"에 기대서 불안을 빗겨섰다.
돌이켜 보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를 비롯해서 여기도 저기도 모두 각자의 문제에 망가지고 뒤틀려 있었지만 그래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한 톨의 낭비도 없이 사랑했다. 난 여전히 그래도 사랑해. 우리의 모든 실수와 일탈, 그리고 오류를 사랑해. 우리의 끝없는 불안은 결국은 '그래도 사랑해' 속에서 사그라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