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솔안나 10시간전

헤매는 즐거움

종착지 노카(Nokka)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가기 위해 트램에서 내린 지 20분이 지났다. 방향을 잡지 못해 오락가락하다가 푸른 숲이 보이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날은 흐리고 을씨년스러웠지만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스마트폰의 구글맵은 현 위치에서 목적지가 9분 거리에 있다고 알려준다. 대충 방향을 정하고 걷다 보니 목적지는 15분으로 늘어나고 다시 20분으로 늘어난다.


어쩌다 보니 올림픽 스타디움 입구로 들어섰다. 검은 동상 아래서 사내아이들 셋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사람들인가. 30여분 걷는 동안 사람 하나도 보지 못했으니 도대체 이 동네는 뭐지? 싶었는데 반가웠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 얘들아, 너희 영어로 말할 수 있니?"

"오케이"

다급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가고 싶은데 어느 쪽인지 알려줄 수 있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핀란드어인 듯했다. 모두 머리를 갸우뚱하는 걸 보니 시벨리우스 공원을 모르는가 보다.

그중 한 아이가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이쪽으로 가면 호수와 공원이 나오긴 해요"

핀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말해준다.

고맙다고 말한 후 아이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빗줄기의 속도가 빨라진다.


 간혹 여행은 그런 것이기도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호수를 끼고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구글맵을 보니 여긴 시벨리우스 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했지만 간혹 여행은 그런 것이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발견한 곳을 자연스레 주워 담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매는 즐거움이 또한 여행이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지나갔더라면 보지 못했을 곳을 볼 수도 있는 것, 그것도 헤매는 과정에서 있는 일이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호수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비가 내려서인지 사람들도 재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진다. 하늘은 여전히 우울한가 보다. 그래도 나는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적함이 평화로워서 습한 거리의 나그네가 되기로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걷다가 호수 한 모퉁이에서 어떤 분주함을 보았다. 물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니 그들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물속을 들여다보며 먹이를 찾기 위해 궁둥이를 하늘로 추켜올리고 머리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며 오리들은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 먹이를 구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며 저들의 식사시간을 내가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피크닉 나온 오리들의 식사시간은 끝날 줄 몰랐고 나는 점심시간을 놓치고 말았으니... 그래도 빗물이 얼굴을 적시는 오후가 좋다. 시간이 좋다.


아침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올 때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삐그덕 거리는 목조건물의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며 하얀 고양이를 만나 눈인사를 했고 흐릿한 하늘을 이고 정원 모퉁이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주인 남자에게 목례만 하고 나왔다. 전형적인 핀란드 남자의 모습이었다. 웃음기도 없고 무뚝뚝해 보이는... 오늘 하늘이 딱 그렇다. 하지만 이런 하늘 아래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식사를 즐기는 무리를 보니 이 순간의 회색빛은 정겨운 그림 한 폭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töölönlahti(töölön 베이)라 불리는 횔뢴라흐티 만 은 마치 호수처럼 느껴졌다.  걷다 보니 국립 오페라 극장이 나왔다. 결국 오늘의 목적지였던 시벨리우스 공원과는 반대로 헬싱키 시내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주변은 국립극장뿐 아니라 국립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들이 있는 지역이었다. 주변 고층 건물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도시의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던걸 보니 주변엔 카페도 많고 맛있는 집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가보기로 했던 곳은 잊기로 했다. 시벨리우스 공원과 이어진 해안에서 도요새 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 준 학생이 누구였는지.

 

어쨌든 괜찮다.

오늘은 오늘 이대로여서 멋지지 않은가!

시벨리우스 공원이야 내일 가도 되고 잘못된 방향을 알았으니 다시 시도해 보면 되지.

오늘은 비도 오는데 수오멘린나에 못 들어가면 어떠냐, 날씨 좋은 내일 가면 되지. 선착장엔 배도 많고 수상택시도 있던데... 하고 위안을 한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늘 이렇게 혼자 다니는데 쫓길게 무어야 그렇지?

     맞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있어?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일정을 바꾸는 게 필요한 거지.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나는 헬싱키 시내로 들어가는 트램을 탔다. 발트해(Baltic Sea)와 맞닿아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가기로 한다.  노카(Nokka), 어딘지 알 것 같다.


      맛있는 거 먹자! 와인도 한잔하고

      그리고 사우나도 해 볼까? 그래 그래.


너그러운 하루

혼자가 혼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나 자신이기에 살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나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던가?

내가

나에게 상냥하게 속삭여 본 적 있던가?

나를 돌아봐주자

그리고 다독여 주자

토닥토닥






 


이전 13화 푸른 고요 속을 걷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