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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솔안나 Jul 11. 2024

푸른 고요 속을 걷다

탐파레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냥, 기차를 탔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하얀 자작나무 숲이 이어졌고 반짝이는 호숫가를 지나기도 했다.

승차권을 검사하는 승무원이 다가온다. 아직 목적지를 기입하지 않은 유레일 패스를 꺼내어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는 내게 다가와 묻는다. "탐파레까지 가나요?"

탐파레? 아, 탐파레...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내리는가 보다. 나는 승차권에 탐파레라 적고 보여주었다. 그는 웃으며 확인을 하고 지나간다.


무작정 기차를 탈 생각만 했다. 어디를 가도 숲과 호수로 가득한 나라였으므로 적당한 곳에서 내리자 생각했다. 처음엔 영화 '카모메 식당'의 마사코가 버섯을 따던 숲을 생각했었다. 헬싱키 근처 국립공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냥 기차를 타고 헬싱키를 벗어나보고 싶었다.

헬싱키에서 두 시간 정도 왔나 보다. 탐파레 중앙역에서 내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로 나섰다. 걷다 보니 호수가 보이는 공원으로 발길이 닿았고 그곳에 앉아 잠시 이 도시의 냄새를 맡으며 오늘의 여정을 계획해 보기로 했다.

핀란드 제2의 도시로 공업과 함께 정보통신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탐파레,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들어선 이곳에서 오늘 하루 나는 무엇을 할까.

로스마니 안티 (Rusmanti) 국립공원을 검색해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배제한다. 빙식작용으로 생겨난 18만 개가 넘는 호수와 17만 개가 넘는 섬이 있는 나라다. 어느 곳을 가든 호수와 숲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그 공원으로 발길을 옮겨보기로 했다.



 

Pyynikki전망대를 목적지로 정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여행을 할 때마다 스마트폰의 구글맵은 가장 친절한 친구가 된다. 이 친구가 알려준 버스를 타고 얼마쯤 달렸을까.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시내를 벗어난 지 5분도 안되었는데 언제 어디서 모두 내렸는지 버스에도 사람이 없다. 순간 깨달은 것은 버스를 타는 방향을 잘못 알았다는 것, 그래서 목적지와는 반대로 와 버렸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린 곳이 조용한 마을이었고 타고 온 버스를 그대로 타고 가면 내가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다시 오던 길을 지나 버스는 굽이굽이 산과 호숫가를 끼고돌아 20분 정도를 달려 종점에서 멈췄다. 어느 호숫가의 한적한 마을이다. 버스 안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가 내려야 할 곳을 놓쳤다. 갈 데까지 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결국 마지막 마을에서 혼자 내리게 되었다. 이 버스로 치면 나는 종점에서 타고 종점에서 내린 것이다. 시내에서 탔던 한 무더기 사람들은 모두 피니키 공원 입구에서 내린 듯했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 어디론가 가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혼자였고 그 누구도 이곳에서 같이 내린 사람은 없었다.                                                                                                      

호숫가 Isolähteen거리는 온통 가을바람
푸른 고요 속을 걷다

지도를 보니 pyhäjärvi(피하 호수)가 펼쳐진 마을이었다. 호수라 하기엔 너무 거대해 마치 바닷가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의 바람은 언제나 그렇듯 시원하면서도 많은걸 헝클어 뜨린다. 머리카락이, 마음이, 머플러가 바람에 날려 흩어져도 좋았다. 물결은 딱 바람이 지나는 만큼 소리를 내며 출렁거렸다. 보트가 나란히 정박해 있는 호숫가는 그림 같았고 마을과 호수 사이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마치 세상을 다 갖은 양 여유로웠다. 아무도 내다보는 이 없는 조용한 마을, 불어오는 바람에서 적막한 냄새가 난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들으며 걷는다. 짐노페디는 다소 애상적인 분위기의 피아노곡이지만 마치 명상을 하는 느낌이다. 푸른 고요 속으로 걸어간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흙을 밟는 소리와 풀잎의 향기, 새들의 지저귐이 깔려있는 고요 속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는 순간이 몽환적이다.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출렁이는 물결에 잠시 시선을 보낸다. 간지럽다. 순간, 어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하얀 고양이가 생각난다. 현관 앞 벤치에 누워 가르랑거리던 소리, 지금 내 마음의 소리도 호수 위에 가르랑 대는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니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길을 만났다.  버스를 타고 지나온 길이었다. 얼마나 가야 할지는 모르지만 피니키 전망대까지는 걷기로 했다. 버스가 지나 온 방향으로 걷다가 산을 향해 오르면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오지 않을까. 이젠 목적지와는 상관없이 눈앞에 펼쳐진 한적한 길을 걷는, 행복한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피니키(Pyynikki) 자연공원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왼쪽으로 숲이, 오른쪽으로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그 길을 걸으며 호흡을 하고 있는 시간이 바로 평화였다.

피니키 공원의 전망대 입구까지는 탐파레 시내에서 버스로 20여분이면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버스종점인 마을에서부터 피니키 공원을 향해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여정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 경로가 내겐 어울렸고 만족스러웠다. 사람이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줄이야...

외딴 길을 걷는 행복을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껴보시라.
가슴 벅찬 감동으로 밀려올 것이다.


얼마쯤 길을 걷다 보니 피니키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호수에서부터 나는 줄곧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전곡을 들으며 걸었다. 명상을 하며 수행하듯 한발 한발 소중하게 내디뎠다. 느리고 부드러운 선율로 구성된 이 곡은 평온함과 안정감을 준다. 숲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들으며 숲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숲을 오르다가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발을 멈췄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었다. 평평한 바위에 작은 담요를 깔고 앉았다. 바라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족했다. 호숫가 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한 시간가량 걸었나 보다.

한적함이 주는 편안한 길을 걸어 숲으로 들어왔고 언덕을 오르며 등산하는 맛을 잠시 느꼈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 줄이야. 내 마음이 넓어졌다. 보이는 호수의 크기만큼일지, 보이는 하늘의 구름만큼인지는 모르겠다. 수축되었던 마음의 길들이 한 시간을 걸으면서 넓혀진 듯하다. 무심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잘 지내고들 있겠지? 안부 좀 전해야겠어. 마음이 부들부들 해지는 느낌이다.


                        전망대로 가는 길목에서 돌아보니 걸어온 피하호수가 보인다




몇 개월째 타국에 나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쌓아둔 스트레스가 있었나 보다. 저 호수로 던져지고 있는 생각의 쓰레기들, 마음의 길이 넓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은 위로가 된다. 그런 길을 걸었고 풍경을 보았다. 문득, 왜 나는 여기까지 와야 했던 것일까, 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기쁘고 행복한 걸까, 이럴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스스로에게 답을 주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다.

이어폰을 빼고 반복 재생하던 음악을 껐다. 이젠 자연의 소리만 들을 필요가 생겼다. 짐노페디 1번을 들으며 걷던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호수엔 검푸른 숲이 뭉텅뭉텅 담겨있다. 끓어오르던 것들이 있다면 바로 식을 것처럼 차가워 보인다.


내 안에도 끓고 있는 화산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폭발해 검은흙을 토해 낼지도 모른다. 서서히 식혀가며 안에서 맑음이 되어 흐르게 하고 싶다. 흐르는 바람에 나를 맡기고 그 바람으로 화를 씻어내고 자연이 제공한 자리에서 가슴이 후련해지고 싶다. 나 다운 숨결이 깊어지도록 애쓰며 살고 싶다. 지금 이 자리가 그런 평화의 침묵이 흐르는 곳이라는 걸 나는 느끼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길 위에서 얻는 위로는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을 헛되지 않음으로 정돈을 해 주는 것이리라.


Pyynikki 전망대까지는 숲과 숲을 돌아서 한참을 걸은 뒤에야 도착했다. 전망대 근처에 와서야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탐파레 시내의 näsijärvi(내시 호수) 공원에서 보았던 젊은이도 있었다. 가끔 스치던 얼굴을 또 다른 장소에서 스치듯 본다는 것이 묘한 반가움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면 여행의 맛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함께 찾아서 바라보는 것.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도 빛으로 가득한 날을 찾아 시간을 여행하는 꿈을 꾸는 것. 그러면서 비밀스러운 나의 고즈넉한 자리를 찜해 놓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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