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품은 詩

'허공 한 줌' 그리고 '성장'

by 혜솔

나는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되어가고 있다. 두 번째 시집을 낸 후 5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시집 한 권에 넣을 분량을 못 채우고 있다니... 그러면서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읽고 글을 쓴다. 나의 덜 여문 시들을 위하여 오늘도 두 편의 시를 읽었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 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이야.
-나희덕의 <허공 한 줌> 전문


내가 처음 이 시를 읽은 때는 두 아들을 다 키워놓은 중년의 엄마로 들어서고 있을 때쯤이었다. 시를 읽으며 마치 한 장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소름이 돋았다. 작가는 두 손을 움켜쥔 채 공중에 붕 떠있는 엄마를 그려내고 있는 중은 아닐까? 어떤 기적을 그리는 중일 거야,라고 상상하며 눈은 글자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죽었다. 아기를 잡지 못하고 허공 한 줌만 쥔 채로. 그러나 아기가 살아있는 것을 안 엄마는 다시 살아나서 아기를 안고 병원에 다녀온다. 그리고 아기를 멀쩡하게 눕히고 도닥인 뒤 엄마는 다시 죽는다.

만들어 낸 이야기든 아니든 도대체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아이를 사랑하는, 그것이 전부일 수도 있는 절대적인 사랑을 품은 존재. 아이의 생사를 확인한 후에야 편히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엄마이다. 이 시가 엄마의 그런 사랑(모성)을 말하고자 쓴 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그다음 연을 보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시의 끝에서 시인은 말한다. 텅 비어있을 때도 꽉 차 있었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허공 한 줌까지도 놓아주려 했다는 것을… 그래서 1연의 이야기가 너무 아프고 2연의 행위가 다소 차갑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쥐고 살았던 것은 무엇일까. 위험에 처한 내 아이를 붙잡으려 할 때 잡히는 것이 허공 한 줌뿐이었다면, 그 죄책감은 상상만 해도 너무 슬프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나희덕 시인의 시작 노트를 보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곤 잊고 있었다.

얼마 전 문학평론가 신형철교수의 저서 <인생의 역사>를 통해서 이 시를 다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고맙게도 오래전에 풀 수 없었던 나희덕 시인의 시작노트에 해당하는 글이 인용되어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쓴 시론서에 담긴 내용이다. 재인용할 수도 있지만 오래전 나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나희덕 시인의 그 책을 직접 읽어보았다. 시인의 시에 나타난 모성성, 여성성에 관한 담론을 펼치는 속에서 '허공 한 줌'에 대한 빗나간 독법에 관한 시인의 견해이다. '허공 한 줌'을 지극한 모성의 서사로 읽는 경우를 다른 각도로 틀어주는 내용이었다.


물론 아기를 붙잡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죽기도 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 아기를 병원으로 데리고 달려가는 어머니 모습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지극한 모성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부각시키고 싶었던 주제는 모성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관해서였다. 그런 의도는 '허공 한 줌'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나, 이야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담긴 2연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다.
(… 중략…)
내가 이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듣고 시까지 쓰게 된 것은 아기를 놓친 엄마가 순간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그 죽음은 물론 자식에 대한 사랑의 좌절로 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움켜쥠(執)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움켜쥔 채 살고 있는 것인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공 한 줌 속에도 얼마나 많은 감정과 집념이 들어있는 것인지 삶과 죽음도 결국 그 움켜쥠과 놓아줌에 다른 말이 아닌지… 이런 생각의 계기를 그 이야기는 내게 던져주었다. 그런데 이 시조차도 내 시의 모성성을 확인하기 위한 보충자료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나희덕 <보랏빛 어디에서 오는가> P67-68


신형철 교수는 이 시를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싶고, 나희덕 시인은 시론 <보랏빛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움켜쥠(집착)에 더 비중을 두고 시를 썼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 간격을 좁혀보고자 이 시의 이야기는 '사랑의 집착'이라고 신형철 교수는 어루만진다.

시인은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므로 당연한 것을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을 거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사랑을 부드럽게 내려놓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을 거다'라고. 사랑의 배후에 있는 '움켜쥠'의 에너지로부터 성숙한 거리를 두는 일의 깊이를 생각하며 시를 썼을 거라고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다, 집착도 사랑인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처음 이 시를 접했던 시기, 조금은 젊은 엄마였을 그때는 답답했었다. <보랏빛 어디에서 오는가>를 읽어 볼 생각도 못했으니까. 또 그 당시엔 시인의 해석을 이해하기 힘들 만큼 집착이 강한 엄마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대신 죽어도 되는 게 엄마 아니냐고. 나는 그 이상으로 내 아이를 사랑하는데 무엇을 놓아주란 말인가. 모성이라는 사랑 위에 덮여있는 집착,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들 둘을 다 결혼시키고 나서야 이 시를 제대로 읽고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닌지.


이시영 시인의 '성장'이라는 시를 읽다가 문득, 나희덕 시인의 '허공 한 줌'을 생각했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아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강물은 새벽강에 시린 몸을 한 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이시영의 <성장> 전문


꼭 감싸 안고, 지켜주고 키워온, 아이와의 거리를 서서히 둔다. 어느 순간 '그래, 잘 가거라 내 아가 들아' 하며 더 크고 멋진 삶을 살라고 보내 준다. 자녀가 바르게 자랄 수 있기를 바라며 돌봐왔던 시기, 성장하기를 기다렸던 시간들, 떠나는 과정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움켜쥐고 있었다고 치자. 때가 되어 보낼 때는 허공 한 줌까지 다 돌려보내는 마음이어야 서로를 존중하는 의식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로소 '허공 한 줌'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 것일까. 부모의 사랑은 떠나보냄에서 완성된다는 걸 부모는 스스로에게 가르쳐 주고 준비를 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본다.


덜 여문 나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선후배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 그리고 그 시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로 한다. 분명한 사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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