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그럴 수 있나?
수년 전 ‘그럴 수 있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뭐만 하면 그럴 수 있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뭐가 그럴 수 있냐며 일갈했습니다. 그 이야기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도 오래 듣고 지내다 보니,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사람이 여럿인 만큼 생각도 여럿인 건 당연합니다. ‘그럴 수 있다’는 문장 덕분에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동의는 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타인에게만 적용되어왔다는 점입니다. 그럴 수 있다며 숱하게 객관적인 척하다가도,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좀처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오히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자책합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해봐도, 결국엔 다시 ‘이럴 수가 있나’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상하게도 내게 일어난 일은 특별하게 대합니다.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러지’라면서.
사실 세상은 ‘나’라는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에 널린 사람들 중 ‘1’일 뿐입니다. 조금 섭섭하지만 진짭니다. 철저하게 나를 타자화 시키면, 내게 일어난 일도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가 잘 안되는 건, 나만큼은 나한테 완전히 공감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마저 타인의 시각에서 그럴 수 있다며 별일 아닌 걸로 만들면, 좀 슬프잖아요.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분명 나만 죽을 것 같을 것이다’라는 말을 길게도 썼네요. 이런 짜증 나는 생각을 안 하려면 역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리퍼블릭오브코리아 이겨라!
(저는 0:3으로 진다에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