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택 근무 경력이 9년째인 프로 재택 근무자다. 1인 기업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어떻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회사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다. 방과 거실이 분리 되지 않은 원룸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3년쯤 되었을 때 건강에 이상 신호가 생겼다. 낮은 책상에서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마우스도 없이 일하고, 낮밤이 바뀌어 바이오리듬은 엉망이 되었으며, 잦은 야식으로 소화 기관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허리와 무릎이었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내 하루 걸음수는 1000보가 채 되지 않았고, 심한 날에는 100보 미만이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니 혈액 순환이 되지 않고, 야식으로 얻은 뱃살은 허리와 무릎에 치명적이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은 건강 상태와 스트레스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분만 뛰어도 죽을 것 같았다. 1키로를 한 번에 뛰지 못하고, 뛰다걷다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듯 힘들었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던 종아리와 허벅지도 터질 것 같이 아팠다. 차마 누르지도 못해서 슬슬 쓰다듬는 수준으로 근육을 풀었다. 그래도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빨리 뛰는 것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운동하는 동안 잡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뛰고 나면 개운한 땀과 함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달리기를 검색했었다. 페미니즘 이슈가 생기기 한참 전인 그때 달리기는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는 달리기는 가슴이 쳐지니 웬만하면 하지 말아라, 종아리에 못생긴 근육이 잡혀서 하이힐을 신어도 감춰지지 않는다, 여성 마라토너의 사진을 첨부하며 달리기는 체지방이 많이 빠져 여성스러운 라인을 잃기 때문에 여성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허벅지가 두꺼워져 남자처럼 된다 같은 것들 뿐이었다. 사실 나 역시도 위와 같은 문제들로 달리기를 계속해도 되는 것인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PT도 받아보고, 수영이나 요가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를 만들어준다는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쉽고 편하게 기초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전신 운동은 역시 달리기만한게 없었다. 달리는데에는 특별한 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다른 장소가 필요하지도 않다.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낮이고, 밤이고 그냥 운동화 신고 나가 집 앞에서부터 뛰기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운동의 목적이 튼튼한 몸, 건강한 체력을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달리기가 좋았다. 체력을 키우는 운동을 할 것인가? 몸매가 예쁘게 교정되는 운동을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몇번이나 부딪힌 이후에야 내가 원하는 것은 체력을 키우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두가지 다 잡는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여유가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가는 허벅지보다 근육이 잘 잡혀 튼튼한 허벅지가 좋고, 매끈한 종아리 보다 달리기로 단련된 알이 불툭 튀어나온 종아리가 더 자랑스러워졌다. 이전에 여성의 운동이란 다이어트와 여성스러운 라인만이 목적이였기 때문에 페미니즘 이슈가 불거지고 나서야 달리기하면 다리가 두꺼워진다는 사람들에게 "살 빼려고 운동하는거 아닌데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기를 시작한지 벌써 6년 째. 이제는 10키로미터를 50분대 초반으로 들어올정도로 실력이 많이 향상 되었다. 운동은 습관이 되어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로 신경 주사를 여러번 맞지 않아도 되고, 물리치료를 이틀에 한번씩 가지 않아도 되었다. 살이 빠졌고 발목과 종아리에는 두껍게 근육이 잡혔다. 코어 근육도 탄탄해져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도 큰 무리가 없다. 운동을 시작하고 제일 좋은 것은 건강을 되찾은 것 뿐만 아니라 몸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달리기를 통해 체력이 향상되고, 꾸준한 노력으로 실력이 향상되는 경험을 하자 다른 운동을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나는 이제 학창시절 점심시간만 되면 운동장으로 튀어나가 신나게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종일 앉아만 있느라 응축된 에너지를 운동으로 발산하고나면 부정적인 감정들과 번잡스럽던 생각들도 깨끗하게 빠져나갔다. 몸이 피곤하니 밤에 잠도 잘잤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2n년동안 모르고 살았나 억울할정도였다. 그래서 지난 2017년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에서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떠나길 선택할까?'란 주제가 나왔을 때 크게 공감했다. 얼굴이 탈까봐, 못생긴 근육이 생길까봐, 땀 흘리는게 싫어서.. 많은 이유로 운동을 거부하고 살아온 지난 날이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더 많은 여자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보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이제는 재택 근무에도 루틴이 생겼다. 9시반쯤 일어나 씻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뒤 커피를 내린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1시까지 내리 일을 하고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보통은 3키로미터, 날씨가 좋으면 5키로미터를 달리고 돌아온다. 1시에 달리기를 하러 집 근처 체육센터에 가면 7살~9살쯤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공을 차거나 방과 후 축구교실로 보이는 수업을 듣고 있고,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빛이 들지 않는 그늘 아래 앉아있다. 내가 어렸을 때와 하나도 다름 없는 모습들이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고 체육센터를 뛰기 시작한다. 체육센터의 달리기 트랙은 한바퀴에 450미터라 3키로미터를 뛸 때는 7바퀴, 5키로미터를 뛸 때는 12바퀴쯤 돈다. 나는 일부러 여자아이들이 앉아있는 곳에서 더 활기찬 표정으로 달린다. 아이들은 운동하는 여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쳐다본다. 달리는 내가 궁금한지 여러번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확인한다.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고 인사를 건내기도, 그냥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너무 즐겁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달리고 있으면, 2~3바퀴쯤 될 때 한두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 아래로 나온다. 개중 몇몇은 나처럼 트랙을 달리기 시작한다. 저들끼리 손을 잡고 달리기도 하고, 술래잡기 하듯 양팔을 벌리고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뛰기도 한다. 내가 그쪽 트랙에 도착했을 때 같이 뛰려고 기다렸다가 뛰기 시작하는 아이도 있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고있으면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여자아이들이 모두 나와 트랙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한 마음이 가득든다. 이때의 기억이 운동에대한 긍정적 경험으로 남기를,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땀 흘려 운동하는 즐거움을 알았지만 저 아이들만큼은 운동장을 마음껏 누비며 달리기를, 다이어트와 아름다운 몸매 만들기로 건강을 해치지 않고 체력을 잘 다지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1시에 달리기를 하러 간다. 가장 많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