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 공원을 청소한다. 비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프거나, 며칠 집을 비울 때 빼고는 거의 매일 쓰레기를 줍는다. 산책만 하던 공원을 청소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왼쪽 귀 전정신경에 문제가 생긴 뒤부터다. 어지럼증으로 고생하면서 공원을 청소하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공원 한 바퀴가 1,004미터다. 몇 바퀴 돌면 운동이 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지럽다. 한번 훼손된 신경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 꾸준한 재활치료가 필요하다. 전정신경 작동이 멈추었으니 중추신경 반응에 따라 일상생활 가능 확률이 달라진다. 좀 더 나은 상태를 위해 매일 걸으며 중심 잡는 운동을 해야 하는 장소로 집 앞 공원은 더없이 소중한 곳이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니 모든 사물을 천천히 볼 수 있게 되면서 쓰레기도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를 주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매일 쓰레기를 줍겠다고. 약속은 종종 삶의 호위 무사가 되지 않던가. 쓰레기 찾으려 좌우,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이니 괜찮은 운동이 되었다.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 걷는 것이 절실했던 나는, 그렇게 공원 청소부가 되었다.
모자 쓰고 장갑 끼고 종이봉투와 집게 들고 공원으로 나간다. 담배꽁초, 사탕 껍질, 마스크, 영수증 조각, 음료수병, 아이스크림 봉지, 광고지 등등 쓰레기를 줍는다. 쓰레기를 찾다 보니 공원 구석구석 펼쳐지는 세밀한 변화를 눈치채게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쓰레기뿐만 아니라 매일 달라지는 공원 모습이다. 딱딱한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과 마른 가지에서 푸릇한 것이 돋아나는 모습, 연두가 초록이 되는 풍성한 계절 변화, 비슷비슷한 색으로 변하면서 제각각 품위를 잃지 않는 가을 풍경,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새벽 등등.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만나게 되는 지렁이들, 해 목욕하는 비둘기들, 농구공을 주고받는 청년들과 배드민턴 치는 학생들, 자전거 배우는 아이들, 그 뒤에서 웃고 있는 어른들.
쓰레기를 주우니,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매일 다를 수 있는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예를 들면, 땅과 하늘을 오가며 지저귀는 새들과 작은 생명체 움직임들. 공원에서 운동기구 사용하는 사람들 표정, 벤치에 앉아 통화하는 이들 음성이 공원을 활기차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천천히 걷다 보니 안 보이고 못 보던 풍경이 눈을 맞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인사한다. 쓰레기 줍는 일이 쉬운 일이지만 그 쉬운 일 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알은체한다. 간혹 어떤 이는 훌륭한 일이라고도 말한다. 어떤 날, 무리 지어 이야기 나누던 할머니 한 분이 “나도 저렇게 쓰레기를 줍고 싶어”라며 당신 다리를 두드렸다. 이처럼 일상에서 특별한 일이란 어떤 요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시시한 일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일이 된다.
내 건강을 위해, 깨끗한 거리를 위해 공원 청소하다가 글 소재를 만나기도 한다. 마음으로 문장을 만든다. 청소는 청소부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글도 작가만 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동네 공원이 내 공원이라 생각하니 ‘소유’라는 고정관념도 달라진다.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소유는 개인 소유 개념이 모인 공간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이런 소유욕은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개인이 모여 모두가 되듯이 개인이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 같은 원리가 단순하게 다가올 때, 고정관념이라는 틀이 해체된다. 공원 청소하면서 건강이 회복되기도, 사유하는 ‘공원 인문학자’가 되기도 하니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쓰레기 있어요, 라며 쓰레기를 주워 주는 어린이를 만나기도 한다. 고사리 같은 아이 손에 들린 쓰레기를 봉투에 담으면서 사회 약속을 투명하게 간직하고 있는 아이 마음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하다. 그러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가 정한 약속이 자주 실종되면서 그 의미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약속은 실행하기 위해 정한 규칙이지만,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그것은 거리에 뒹구는 쓰레기가 증명한다. 쓰레기는 사람 흔적이기 때문이다.
필요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고 지켜져야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약속은 다른 사람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계약이 되기도 한다. 공적인 약속이나 법적인 약속이 효력을 상실하려면 약속한 기간이 끝나야 한다. 기간이 끝나기 전에 약속을 어길 경우, 그에 상응하는 무엇이 있다. 자기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도 같은 맥락이지만, 구체적인 구속력이 없다 보니 스스로 깐깐하지 않으면 흐지부지해지는 일이 허다하다.
여전히 쓰레기가 나오지만, 공원은 예전보다 많이 깨끗하다. 노래하면 노래하는 사람이듯이 청소하면 청소하는 사람이 된다. 공원 청소하는 것은 나에게 한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지킨다. 약속을 오래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 가도 청소할 필요 없는 깨끗한 거리를 걷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시민 의식은 시민이 인식하고 있는 감정과 생각이며 의견이다. 시민은 가정 구성원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가깝게 살아가는 존재다. 미개하고 수준이 낮고 교양 없이 무례한 것을 야만적이라고 한다. 이 야만 속성이 일상을 이루는 소소한 것들로 넘쳐난다면, 우리는 야만적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 수준이 높고 교양 가득하고 기본예절 따르는 이들은 괜찮을까. 야만에 맞서는 낱말은 무엇일까. 속물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야만적일까, 속물적일까. 우리는 어떤 시민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눈꽃이 녹으면 벚꽃이 피고 벚꽃이 다 떨어지면 개나리와 진달래도 피고 질 것이다. 철쭉과 튤립 환희를 기다리다 아카시아꽃 잔치가 열릴 것이다. 나무가 하는 푸른 언어를 새들이 전해 줄 것이고 다색으로 변하는 공원 풍경이 걷는 이들 감탄사로 풍성해질 것이다. 공원 꽃향기가 거리를 헤매는 쓰레기로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리에 잔존한 쓰레기가 흰 눈에 소복이 덮이는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 청소하는 일상도 즐겁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지럼증으로 가끔 몸이 흔들려도 꽃 같은 웃음이 활짝, 피어날지도.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잊지 않는 것처럼, 자연은 자연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잊을 리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