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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Nov 09. 2024

마음에 지질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 지원 사업 선정 작품

  방학이 되면, 강원도 이모네에 갔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에 정착한 부모님과 달리 이모는 철원에 정착했다. 옥수수를 많이 먹을 수 있는 여름이 되면 이모네 가는 날을 기다렸다. 그 마음은 꿈같았고 실제로 꿈을 꾸기도 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흘렀다. 뒷산이 보였으니 그 산에서 내려온 물이었을 것이다. 가끔 지프가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지나면서 날리는 흙먼지가 마당에 가득했다. 미숫가루 같은 먼지가 날아다니는 마당에는 꽃이 만발했다. 무척 예뻤다.

  반세기가 지났다. 흘러간 시간은 장소에 대한 기억을 충분히 편집할 여유를 준다. 자세하지 않지만, 그 시간의 감성과 사실을 조합한 영상은 모노드라마처럼 마음을 움직인다. 그 영상에서 유독 기억이 나는 장소가 고석정이다. 역사적 의미와 지질학적 고찰과는 전혀 무관한 내 어린 날 이미지.  

  사촌들이랑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 고석정에 놀러 갔다. 맑은 한탄강 물줄기에 감탄했는지, 거센 물살을 무서워했는지, 힘차게 흐르고 맴도는 물을 보고 호들갑을 떨다가 돈을 떨어트렸다. 엄마가 챙겨준 돈을 만지작거리다 그 지경이 되어 징징 울었다. 그때, 사촌 오빠가 강으로 다이빙해 돈을 건져 왔다. 함께 있던 이들이 손뼉 치며 기쁜 마음으로 웃었고 나 또한 안도했던 기억은 꽤 선명하다. 성인이 된 후, 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같은 장소에 있었던 그들은 그날 일을 거의 비슷하게 기억했다.  

   

  한탄강에 ‘물윗길’이 있다. 2020년 유네스코 세계 지질 공원으로 인증되어 시월부터 삼월까지 강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개방한다. 물놀이 튜브같이 생긴 것을 연결해 예수처럼 물 위를 걷도록 만들었다. 주상절리와 기암절벽, 신비한 협곡과 어우러지는 야생화의 조화는 지질이 지닌 역사성을 감탄하게 한다. 여름에는 유속이 빠르고 강해 위험하므로 가을과 겨울에만 ‘물윗길’을 걸을 수 있다. 가끔 임도를 걷기도 하지만, 한탄강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비경을 바라보는 발걸음은 밤하늘 별처럼 마음을 반짝이게 한다.

  나에게 철원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장소가 되어 버린 고석정은 처음으로 경험한 먼 여행지다. 처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그것은 호기심 맨 끝자락에서 팔랑이는 마음 같은 것이다. 그때는 한탄강인지도 몰랐고 역사적 사실도 무지했으며 지질학 가치도 전무했다. 그저 기암괴석이 멋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놀았던 기억이 가득하다. 그 기억 중에서 맑은 물과 힘찬 물살 느낌이 아직 살아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형성된 생각이 무늬가 되고 입체가 되어 현재라는 삶에 경외감을 주는 것, 그 자체가 감탄이다. 세월이라는 숫자보다는 세월이라는 낱말이 주는 의미를 한탄강 주상절리 모습에서 새롭게 인식한다. 주상절리처럼, 잊을 수 없는 세월이기도 하지만 잊힌 세월이 있기에 누구에게나 자기만 가지고 있는 생의 지질이 있다. 잊힌 일이나 잊히지 않는 기억이 살금살금 모여 지금을 형성하는 마음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이 주상절리처럼, 기암절벽처럼, 심상한 협곡처럼 자기 삶에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이 마음에 형성된 지질이다.

  국제적으로, 지질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녔기에 세계 지질 공원으로 지정되었듯이 생도 역사성이 있고 그것의 중요함을 알기에 개인이라는 역사는 마음의 지질 공원이다. 기억은 그 기억하는 장소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장소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장소와 사람에 감성이 더해지면 유일한 것이 된다. 기억은 원동력이 되어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기억은 삶의 원소로서, 삶을 총체적 개념으로 인식하게 하며 풍요롭게 한다.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기억과 망각이라는 집합체가 삶의 지질을 형성하듯이, 같은 뿌리에서 생성하여 다양한 무늬가 되는 감정과 이성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성이 마음에 지질을 만든다.  

  늘어났다 줄어들고 팽창했다 수축하고 굵어지다 가늘어지는 지형이라는 형태는 사람이 살아 내는 일상과 비슷하다. 옛일이 생각나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지나온 삶이 남긴 표식이나 자리, 불편한 성질을 지닌 습관으로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대화이기에 마음을 모으게 된다. 추억은 단순히 회상하는 것만은 아니다. 추억만큼 가치 있는 옛일이 현재 형성된 마음 변화에 대한 궁금증이 된다. 궁금증은 변화하는 마음과 변화하는 특성에 대한 축적과 묘사이며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준 이치를 알고자 하는 적극성이다. 자기를 형성한 것들, 즉, 삶의 온도에 따라, 삶의 지형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 그것은 지극히 성숙한 일이다.   

  

  유년의 여행지였던 철원 고석정에 대한 기억이 내 마음에 지질을 형성했음이 분명하다. 돈을 떨어트렸으나 함께한 이들의 응원과 적극적인 사촌 오빠 도움으로 돈을 찾았던 기억은 마음에 절리를 형성했다. 비난보다는 응원이 있었고 실수로 인한 당황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했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유년의 기억이지만 어리고 어린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삶이라는 협곡에서, 어른으로 살아가는 길목마다 되살아나는 포근함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실수를 비난하게 되거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어색했던 순간마다, 아마, 유년 기억은 의존하는 행동에서 벗어날 힘이 되었을 것이다. 거짓말하면서 즐기거나 얼룩진 생각에 머무는, 어쩌면 미친 짓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불러낸다. 깊은 밤인지 동트기 전 새벽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거나 빛을 찾는 마음이 유년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이 마음에 묘한 흔적을 남긴 여러 기억 중 하나다. 기후 변화와 강 흐름과 유속 변화로 한탄강 주상절리가 계속 달라지듯이 삶의 지질도 변화하리다.

  어린 시절 기억은 유아적 습성에서 벗어나는 자력이며 그것은 결코 소란스러운 것도 과장된 것도 아니다. 개인의 독창적 언어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세상과 관계를 이어 가는 요소로 팽창하며 조용히 가시화한다. 숨소리처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순환하며 확장한다. 생생하게 생각나거나, 아름아름 희미하거나, 사라졌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삶을 재현하거나 편집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 그것은 가만히 두 귀를 열어 한탄강 소리를 듣는 마음이다. 한겨울 지나 초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얼음을 녹이며 흐르는 조곤조곤한 강물 소리를 듣는 마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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