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환유(換喩)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 지원 사업 선정 작품
오어사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자동차 와이퍼는 차창에 떨어지는 비를 차근차근 지운다. 빗방울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기에는 와이퍼 성능이 그리 좋지 않다. 그런데도 비가 내리는 날 여행이 조금 우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추적추적한 비의 우아함이라니. 비 오는 날, 야외 공연장에서 춤추는 무용가를 보았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필름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천천히 내리는 빗물과 춤 선율의 우아함. 마치 비를 환영하는 기우제 같았던 춤사위.
비 오는 날 여행은 오히려 복잡한 생각을 말끔하게 포기하게 해 준다. 포기하는 자유로움이 품위 있는 생각과 관계가 있다면,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이다. 펼쳐진 우산에 몸을 맞추며 걷는 일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 때문일까. 오히려 어딘가에 맞추는 행위에서 창의력이 생기는 경우랄까. 공간에 스며 있는 기운은 삶의 변이에 적응한 모든 궤적이 아닐까. 한정된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 방에서, 실험실에서, 무대에서, 캔버스에서, 메모지에서, 책에서 그리고 우산에서.
눈길 닿는 곳마다 튕기는 낯섦이 비와 함께 물감처럼 오방으로 번진다. 소리가 요란하지 않은 실비는 마치 분무기를 뿌린 것 같은, 기기묘묘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이다. 흐릿한 눈으로 출렁다리 건너 숲을 본다. 내 시선은 하늘거리는 빗줄기를 횡단한다. 처음 와 보는 오어사 풍경이 꽤 생각에 빠지기 알맞다고 사유한다. 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생각이 비와 어울려 춤을 춘다. 마치 빗속에서 춤을 추었던 무용수같이. 역시 우아하다.
오어사(吾魚寺)는 신라 고승 원효와 혜공에 얽힌 설화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오(吾)의 의미를 그제야 알았다. ‘다섯(五) 물고기’가 아니라 ‘내(吾)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두 스님이 내기했다던가. 죽은 물고기를 다시 살려 내는 일종의 게임을. 죽은 물고기가 살아난다는 설정부터 가히 신화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죽은 물고기 중에서 한 마리만 힘차게 헤엄쳤다고 하니, 이 순간부터 함께 수도하는 동지에서 경쟁자가 되면서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어찌 이리 얄궂은 일을 자처했을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해지는 이야기의 해학적인 부분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두 승려가 어떤 연유에서 내기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기 능력을 타인과 겨루는 심리는 비슷하지 않을까. 타인보다 나은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뽐내고자 하는 마음만은 아니다. 자기의 진정한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 마음을 증명하는 일은 꽤 공이 드는 일이며 내기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 법력이 선명해지는 순간, 신성한 서사가 만들어지니. 스님은 죽은 물고기를 살리는 능력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경쟁 심리가 발동할 수밖에. 월등한 능력을 증명하려는 마음은 개결한 마음이다.
이야기 결말이 궁금하다. 그래서 누구 물고기가 살았을까, 어느 스님의 논리가 탄탄했을까, 그래서 승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이후 물고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달팽이가 느리게 움직이듯이 오어사 이야기도 천천히 구전될 것이다.
생각나는 동화가 있다. 백만 번을 산 고양이(『100만 번 산 고양이』사노 요코 글 그림, 비룡소, 2016) 이야기다. 이 고양이는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그때마다 다른 삶을 산다. 그런데 그 삶이 그리 즐겁지 않다. 다시 만나는 주인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데 그 삶은 고양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 고양이로서 사는 것이지 자기 삶이 아니니까.
약육강식으로 죽거나, 환경 오염으로 죽거나, 죽을 만큼 살다가 죽거나, 너무나 슬퍼서 죽거나, 누구나 죽는다. 결국 고양이는 도둑고양이로 살았고 그때 만난 하얀 고양이와 함께 한 삶이 백만 번 중에서 딱 한 번의 자기 삶이었다. 하얀 고양이가 죽었을 때,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울고 울다가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삶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거듭해서 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자기 주도적이지 않은 삶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계속 죽어도 계속 태어난 고양이가 그리 즐거운 삶이 아니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소유물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한 죽음이란, 진정한 자아로 살았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고양이 죽음으로 깨닫는다. 윤회에도 끝이 있다는 아이러니다.
다시 살아나는 물고기는 설화에 존재한다. 다시 살아나는 고양이는 동화에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은 없다. 만약에 물고기나 고양이가 영생한다면 신이 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백만 번 산 고양이조차 사랑하는 하얀 고양이가 죽은 후, 슬픔에 겨워 오래지 않아 죽었지 않은가. 그리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듯이, 한 번 태어남과 죽음은 성스러운 일이다.
원효와 혜공 물고기 중 누구 물고기가 살아났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다시 살아난 물고기는 내가 나인 삶을 살아야만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살아 있을 때부터 어류가 아닌 물고기로 불리는 피식자 삶을 거부하고 싶은지도 모르니까. 죽은 물고기와 살아난 물고기 운명이 두 스님 능력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고통은 산자의 해석이다. 죽음이 평온하고 안식이 될 수 있음은 죽은 자만이 아는 것이 아닐까.
전시관에서 원효의 해지고 낡은 삼각형 모양의 삿갓을 본다. 비 오는 날, 우산이 되었을 스님 유물에서 갓 쓰고 빗속을 걸어 다녔을 스님을 상상한다. 비와 윤회의 조화, 다시 태어나는 존귀한 생명과 현생의 안위와 평안 등등. 죽음 끝에서 만나게 되는 세상에 대한 회한은 무엇일까. 전시관을 나오면서 우산을 활짝, 편다. 삼각형이 되다가 원이 되는 우산. 나 혼자 오롯이 들어갈 수 있는 동그란 우산이 비를 피하게 해 준다. 세상 번뇌에서 해방하는 기분이다. 이처럼, 해탈하는 경지가 우산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 평온한 상태를 누리는 공간이 우산 하나면 족하니 이 얼마나 팽창하는 만족감인가.
자그마한 절 마당에서 만난 사람들 시선이 아득하다. 어떤 목표가 없는 얼굴이다. 발걸음에서 무엇을 찾는 부산함이 없다.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과 상관없는 얼굴이다. 가끔 일행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거나 이름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서 안전한 현재 상태를 확인한다. 비 오는 날, 사찰에서 바쁜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람들 다리만 보아도 표정을 보는 기분이다.
오어사의 하루가 점점 기울고 있다. 우산을 접고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차창에 떨어져 있던 빗방울이 와이퍼로 뭉개진다. 이내 비는 방울방울 다시 떨어지고 지워지고….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는 윤회의 꼬리를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