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 인생의 끝이라는 사실을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
(Everything that has a beginning has an end)
-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
나름 직장인이라는 톱니바퀴 부품의 한 조각으로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회식자리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친한 친구 한두 명 하고 마주 앉으면 3박 4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많은 이야기들이 직장 내 회식자리에서만큼은 3.4초도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회식자리지만 그래도 정말 피할 수 없는 회식만큼은 참석해야만 한다. 그게 톱니바퀴 1490호의 역할 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별로 즐겁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다 보면 자꾸 집중할 거리를 찾게 된다. 스마트폰만 너무 자주 보기에는 눈치가 보이니 테이블 위에 있는 무언가를 깊이 바라보는데 오늘따라 소주병 뚜껑이, 정확히는 스스로를 병뚜껑 삼형제라고 칭하는 그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병뚜껑 삼형제는 나에게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모든 병뚜껑은 동일한 크기와 길이의 꼬다리(병뚜껑에 매달려 있는 가늘고 긴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만 꼬다리 모양은 천차만별이지(인간들의 삶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무한히 늘릴 수도 없고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한정 병뚜껑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어(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고 어딘가에 매여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끝이 있고 어딘가에 매여있는 꼬다리 위를 천천히 걷다가 끝에 도달하면 추락하면서 삶이 끝나게 되는 거야. 인간들 말로 하자면 죽는 거지.
이런 젠장, 오늘 과음했나. 아니면 술을 덜 마셔서 이런 잡생각이 떠오른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스쳐갈 뿐, 첫째 병뚜껑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평생 잘 나갔어, 주어진 때마다 주어진 과제들을 모두 적기에 해치우면서 수직상승만 했지. 인간으로 치면 유치원 때부터 고3 때까지 공부만 해서 서울대를 갔고 조기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해서 3년 마치고 바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바로 이름만 들으면 알 것 같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했지. 그다음부터는 내가 가진 모든 사회적 힘을 동원해서 승리에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지. 내 자식도 나랑 똑같은 코스를 밟게 했는데 자식 두 명 다 성공했어. 그렇게 살면서 부와 명예, 부동산, 비싼 차, 명품들을 모두 한 손에 쥐었을 때 수명이 다해서 그냥 죽었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죽음 앞에서는 말짱 꽝이더라고 어찌나 죽고 싶지 않았던지. 내가 살아만 있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두고 죽으려니까 눈이 감기지 않더라고"
참으로 훌륭한 삶이다. 아마 자식들도 자기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 끝까지 상승하면 천사가 되어서 영생할 것 같은 미신을 믿다가 수십 년 뒤 같은 말을 하며 죽을 것이라는, 뻔한 드라마 속 인생에도 부러운 것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이어서 둘째 병뚜껑이 입을 열었다.
"난 평생 죽어라 노력만 했어. 노력하다 보면 좋은 일이, 내 인생에도 해 뜰 날이 있을 것 같아서 쉬지 않고 일했고 힘든 순간이 와도 악착같이 버텼어. 하루하루가 거의 같은 일상이었고, 여행이라는 것을 가본 적도 거의 없었어, 출근 퇴근 잠, 그리고 출근 이렇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잠에 들었는데 출근을 못하겠더라고. 저 세상에 가보니 내가 잠든 사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네. 23년째 살고 있던 원룸에서. 12년 전 샀던 전기 메트 위에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결국 23년간 나이 먹은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로 삶이 끝나는지도 모르고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눈이 감기지 않더라고. 악착같이 노력의 끝이 돌고 돌아 제자리라니."
첫째 병뚜껑의 삶은 근처에도 못 갔지만 둘째 병뚜껑의 삶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클론의 습격이다. 과연 나는 어제랑 얼마만큼, 작년보다 얼마만큼 다른 삶을 살았나. 오늘 밤 눈을 감았다 뜨지 못했을 땐 내 삶은 둘째 병뚜껑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있다고 진심으로 외칠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샛째 병뚜껑이 자신의 삶을 늘어놓았다.
"난 평생 후진만 했어. 어째 내가 손을 대는 일은 하는 일마다 다 마이너스더라고. 뭔가 잘 되는 것처럼, 내 삶에 신분상승이라는 것이 일어날 것처럼 승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착각이 끝난 순간, 내 삶은 수직으로 추락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향하더라고. 내가 상승이라고 생각했던 그 지점에서조차 나는 바닥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게 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어. 나는 내가 달리는 길이 올라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지 바닥으로 후진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긴 누가 알 수 있었겠어, 다 자기 인생이라는 게 걸을 때는 모르고 끝이 날 때가 돼서야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아는 거지. 물론 그때는 늦지. 이미 인생의 종점이 다 왔다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일이, 내 인생 최악의 결과로 오는 일은 흔하다. 사랑, 일, 투자,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무언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과 심지어 영혼까지 바치지만 그런 간절함과 처절함은 보상받는 일보다는 파멸행 급행열차 티켓 구입 비용으로 지불되는 일이 많은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셋쩨 병뚜껑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생각들이 끝날 무렵, 회식자리도 끝났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말처럼 병뚜껑 꼬다리에도 끝이 있고, 회식에도 끝이 있고, 내 직장생활에도 끝이 있고, 내 삶에도 끝이 있을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그 끝을 어떻게 맺어질지는 전혀 모르겠다. 병뚜껑 삼 형제의 말을 들어봐도 하나 같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긴, 그게 인간의 삶 그 자체 아니었던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따위는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쫒다가 삶의 끝자락에서야 깨닫는 어리석음을 등불 삼아 걷는, 그래서 후회 속에 추락하는 존재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