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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Apr 20. 2022

완벽한 사랑의 딜레마

닿을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랑의 딜레마



매섭게 눈이 내리던 겨울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다란 초 하나, 그보다 짧은 초 다섯 개가 꽂힌 케이크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기름이 가득 찬 난로 앞에 모여 앉아 따뜻한 미역국과 제과점의 생크림 케이크까지 누린 그날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축하의 시간이었으나 왜인지 그 눈물에서는 서로를 향한 연민의 짠맛이 났다.


나는 인간이란 어린 묘목이 성인으로서 자리를 잡기까지 필요로 하는 양질의 토양과 햇빛은 마땅히 부모가 제공해야 한다 여긴다. 연민의 짠맛을 느끼던 그날, 나는 출처는 확실하나 과정은 명확하지 않은 녹슨 상처들을 마주했다. 언제 곪았는지 모를 상처들은 검푸른 색을 띤 채 딱딱했고 구태여 떼어내지 않으면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나와 평생을 함께할 요량인 듯했다. 이처럼 필수적 요소가 충족되지 못한 묘목들은 저마다 결핍이 할퀸 생채기를 품은 채 애써 자라나야 한다.


언어적 사랑실조로 마음 표현 능력이 유난히 홀쭉했던 나는 기나긴 회복기를 거쳐 서른이 넘은 후에야 마음의 살을 찌워낼 수 있었다. 그토록 파리하던 시절을 뒤로한 채 나는 지금 “사랑을 사랑 한다”라 외치며 산다. 여기서 사랑은 비단 성애적인 마음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습도와 어우러진 햇볕 아래서 하는 산책,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때마다 움직이는 말랑한 뱃살을 가진 고양이와의 낮잠,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을 한 줄의 문장으로 완성했을 때 느끼는 감정들을 포함한다. 구태여 하지 않아도 취업에 불이익이 있다거나 은행 대출 심사에 결격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각기 열심히 찾아 나서는 그 숭고한 마음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 어린 묘목에 생긴 생채기는 훤해진 신수 어딘가에 여전히 제 존재의 권력을 톡톡히 행사하고 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 회사에 다니는 근엄한 아빠와 가정을 돌보는 상냥한 엄마.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애를 발휘하는 형제. 마치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가족의 모양새가 확고하던 그때, 집안에 어른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핵가족 형태는 마치 미래의 문제인 양 학습하던 그 시절. 더할 것 없는 보살핌을 받고 자랐음에도 할머니를 엄마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쏟아진 철없는 놀림에 모래성처럼 쉬이 무너지던 나의 결핍은 완벽한 사랑의 구색을 추구하는 욕구 안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내게 완벽한 사랑의 구색이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변명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까닭을 말한다. 내 가족의 형태를 실수라 칭할 순 없으나 부모의 행실은 명백한 잘못이었으므로 나는 몇 번이고 의도 없는 질문 앞에 움츠러들었다. 변명을 동반하는 허술한 사랑은 그때에도, 지금도 주인이 없다.


나의 ‘완벽’에 대한 욕구는 대상과 상황을 가리지 않으며 상호 교류로 이루어진 성애적 사랑에도 물론 해당한다. 그 어떤 단계 없이 한순간에 삶의 중심부로 진입한 그에게 서둘러 몰입의 단계를 밟아가는 일. 당사자는 모르게 은밀히 키워가는 기대. 적당한 구색을 갖춘 관계에서 드러나는 공허함. 이윽고 ‘다름’이 ‘틀림’으로 변화하며 폭발하는 갈망. 그것이 반복될 때 그와 나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지는 당장의 허술한 관계를 해소시켜줄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막연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반복적 무결 추구 드라마의 엔딩에는 완벽함이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을까. 왜인지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허무해진다.


이 허무함 앞에서 나는 사랑을 명확하게 사랑함과 동시에 의심한다. 행복, 분노, 증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랑은 끊임없이 추궁 당하고 매도된다. 증오일까?에 대한 질문이 가뭄과 같다면 사랑일까?에 대한 질문은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행복은 최소한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을 타고 찾아온다. 그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예보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부단히 의심해야 한다.


이토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은 예술에게 인기가 좋아 끊임없이 노래로, 글로, 영상으로서 표현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완벽한 사랑에 대한 설계는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한 사랑’이 누군가에 의해 정의 내려질 수 있었다면, 우리가 열광한 수많은 작품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완벽에 대한 구애 또한 닿지 않는 무지개 끝을 쫓듯 끝내 몰입과 안정의 과정을 겪지 못하고 기억으로 남겨질지 모를 일이다. 어린 묘목에 생긴 상처 회복을 향한 갈망과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하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사랑, 아니 인생의 딜레마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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