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나여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가늠할 수 없는 환대라는 게 있다는 것을 개는 알게 해준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여름이를 사랑한다. - 117P.
너를 시로 쓴다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 너는 웃기는 강아지인데 나는 시인도 아니면서 왜 슬프고 서늘한 문장만 떠오를까 - 140P.
#나개있음에감사하오 #아침달 #시
재작년인가, 생일선물로 고양이 시집(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을 선물로 받고 개를 주제로 쓴 시집이 있다고 하여, 읽고 싶다고 말했는데, 읽은 지는 꽤 됐는데, 기록을 안 해둬서 결국 다시 읽었다. 고양이가 선망의 대상이라면 개는 추억의 대상이라고 예전에 써놨던데, 처음 읽을 때가 추억이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도도했던 이전 고양이 시집과 다를까? 개와 고양이의 차이가 있는 만큼 크지 않을까? 아니 같다. 둘 다 사랑이 넘치는 시집이니까. 다정함과 감사, 둘 다 자신의 반려에게 가지는 감정일 테니까. 여전히 좋든 나쁘든 ‘개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 나지만 그렇게라도 나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 때와는 다르게, ‘멍’ 소리를 내면서 읽지는 못했다. 키웠던 강아지들이 생각나서, 내가 그때 얼마나 어렸는지가 기억이 나서.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을 보면 ‘어머 너무 귀엽다’하고 말하며 실제로 만나보면 행복을 감추지 못하지만, 과거에 집과 가게에서 키우던 아이들을(또또, 라시, 또리) 생각하면, 난 오히려 그때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졌나 싶기도 하다. 분명 보면 사랑스럽고 그런데, 약간 분리했던 것 같은 느낌.
그렇다고 책을 읽는 내내 반성만 한 것은 아니었다. 총총 뛰어오는 댕댕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과거의 아이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같이 자란 것 같은 느낌을 들 때가 많아서. 이들의 사랑은 양방향적이고, 내 성장도 쌍방이었을 테니까.
굳이 강아지, 댕댕이가 아니더라도 나를 성장시켜주는 것은 있겠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았거나, 같은 시간을 공유한 시간이 길었기에. 훨씬 더 나는 그 아이들이 기억에 남기도 한다. 울었던 기억도. 무지개다리를 건넌 친구(라시) 옆에서 우는 또리를 본 아빠가 ‘사람보다 낫다’고 거칠게 말하면서도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까지.
그래서 그런가, 대학생 때 유기견 봉사를 가면 묘하게 더 열심히 했던 것도 있었다. 과거에 못해준 애정을 다하려고, 인기가 많은 봉사라 친구랑 대충 할 사람들은 자르자고 건의했던 것도. 정작 나는 아직 반려()를 키울 생각이 없다. 내가 그만큼의 책임을 못 질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선인장도 키우는 걸 주저하는 사람이라.
묘하게, 이전 시집에서는 ‘애’ 사랑과 다정함에 대해서 주로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는 추억과 책임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같은 주제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낄 수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고양이는 키워 본 적이 없었으나, 선망이 너무 컸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전의 독후감 마무리에, 이 책을 마주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조금 가벼운 마음만 가지지 않았나 했다. 추억을 하면서 반성 되는 부분도 너무 많았어서. 물론 이게 직접적인 실수는 아니지만. 조금 더 자라났음에 대해 생각한다.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니지만, 반려였던 아이들에 대한 꿈을 한번 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