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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Mar 17. 2021

나약한 존재의 기록

다자이오사무-인간실격


인간 실격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허구화 한 작품이다. 제목 “인간 실격”에서 나타나 듯이 스스로를 “인간 실격”이라고 말하는 우울하고 퇴폐적인 소설임에도 몰입하여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장 때문이었다. 화자인 “나”는 주인공 요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 사진을 보고 눈을 감는다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버렸다.- 고교시절 사진인지 대학시절 사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상하게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인간실격 Page 16)

주인공 요조는 눈에 띄는 미남임에도 뚜렷한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마다 외모, 능력을 떠나서 고유한 “기운”이 있는데 소위 사람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요조는 “일반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람과 자신의 연결고리로 터득한 방식은 “익살”이었다. 가족들이 원하는 혹은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천진난만 한 어린아이”인 척 행동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본 모습은 숨긴 채 살아간다.


 역시 요조처럼 어릴 적부터 “존재감”이 뚜렷한 아이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모나지 않게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지내는 편이었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런 내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터득한 방법은 “웃음” 이었다. 어느 모임에나 크게 리액션하고 웃어주는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친구들의 사소한 얘기에도 크게 웃어 주고 리액션을 하면서 내 역할을 찾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웃어주고 들어주는 역할은 때론 존재감이 무디어져 종종 상대방이 선을 넘고는 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선을 넘고 본성을 드러낼 때 요조가 느꼈던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같았다.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인간실격 Page 42)

사람을 두려워함에도 사람들이 좋았고 인정받고 싶었기에 요조처럼 항상 연기하고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특히나 그중 부모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어릴 적에는 요조처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건 있을 수 없었고 부모님을 언짢게 만들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 대꾸는 커녕 그 꾸중 이야말로 말하자면 만세일계,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게 아닐까, 라고 확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실격 page 25)

지금은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의 기대는 어릴 적 보다 많이 저버리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에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때 요조처럼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가볍게는 내 옷 스타일, 내가 내린 사소한 결정들, 더 나아가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연봉, 내 꿈에 대해 “그것 밖에 안되?” 라는 말을 들을 때면 속으로 굉장히 불안해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거의 반 평생을 경제적으로 생가에게 의지하며 지냈다고 한다. 경제적 독립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적 독립이 이뤄질 리 없었다. 총 5번의 자살 시도 중 3번의 자살은 가족들의 신임을 저버린 것에 대한 스스로의 낙담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만큼 다자이 오사무에게 가족은 절대적이고 삶에서 떨어트릴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39년이라는 짧은 생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방황하고 괴로워하던 다자이 오사무의 삶이 낯설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 소설이 일본근대문학을 확립한 소설로 기억되지만 내게는 그런 거창한 타이틀보다 평생 인간의 구애를 바라다가 결국 배반당한 한 나약한 “존재”의 기록으로 기억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나약한 “존재”로서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하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두껍든 얇든 “가면” 이라는 것을 쓰고 연기 하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도 겪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조금 누그러진다. 이 소설이 내게 그랬다. 내가 살아가며 겪고 있는 느낌을, 고통을 과거 이전에도 똑같이 겪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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