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사는 이야기 | 한의원 8체질
엄마와 한의원에 갔다. 대기실을 가득 채운 한약 냄새가 내가 지금 다른 병원이 아닌 한의원에 와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진찰실에서 엄마가 먼저 선생님 앞에 앉았다. 나는 그보다 뒤에 떨어져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자연스러운 듯 최근의 증상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엄마와 한 진찰실에 있는 게 어색하여 엄마의 말소리를 의식 저 멀리에 두고 창 밖만 바라봤다. 처서도 벌써 지났지만 한낮은 아직 여름 같은 열기가 있었다.
이곳 한의원을 엄마에게 소개해준 분은 '체질에 맞춰 식단을 바꾼 후에 두드러기가 사라지고 몸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곤 지난 한 달 동안 한의원에 다녔다. 그 결과 엄마가 받은 체질은 고기와 밀가루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쩐지 고기 먹으면 속이 불편했다'며 예상했다는 듯 말했지만, 내가 엄마랑 같은 체질이라면 저렇게 의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기와 밀가루를 빼면... 뭘 먹을 수 있을까?
내 차례가 되었다. 선생님이 내가 진찰 전에 작성했던 문진을 보며 어디가 불편한지 물었다.
"사람 많은 답답한 곳이나 화장실이 없는 뻥 뚫린 곳에 가면 갑자기 배가 아프고 숨이 가빠요."
"오늘 여기 올 때도 그랬어요?"
"네. 지하철 기다리다가 갑자기 숨이 가쁘고 배가 아팠어요."
선생님은 자율신경계에 관해서 설명했다.
"소화 기능도 내가 '의식적'으로 다룰 수 없는 자율신경 중에 하나예요. 스트레스나 자극적인 식단 등에 의해서 자율신경기능의 항상성이 무너질 수 있는데, 그럼 소화의 흡수-분해-순환 기능이 고장 나서 체내에 독소와 노폐물들이 쌓일 수 있어요."
어렴풋이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자율신경을 배운 기억이 났다. 그때는 몇 년 후 내가 몸소 자율신경의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음'을 느껴 병원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스트레스받지 않는 게 중요해요. 밖에서 화장실을 잘 못 가요?"
"네."
나는 깨끗한 회사 화장실에서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조차 불편해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 몰래 학교를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그렇죠. 불편하죠. 저도 그랬는데, 하도 많이 가다 보니까 무뎌졌어요. 맥 한번 짚어볼까요?"
선생님은 내 왼손 오른손 맥을 번갈아 짚어보시더니 몇 군데 침을 놔주셨다.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서는 한 번 더 방문해야 한다고 하셨다. 침을 다 맞고 집에 갈 때는 30분 넘게 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도 숨이 가쁘거나 배가 아프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 다시 방문했을 때 '수음 체질'이라고 진단을 받았다. 수음 체질은 역시나 위장이 약했다.
오이는 원래 안 좋아하고, 돼지고기보다는 소고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돼지고기는 안 먹을 수 있었다. 카페인도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생긴 이후로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괜찮았다. 그런데 '찬 음식'이 복병이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얼죽아'이고, 여름이면 초계국수 탐방을 다닐 정도로 찬 음식을 좋아한다.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이 정도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생각해보면 찬 음료를 급히 마시면 꼭 탈이 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당시 막 사귄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스무디를 마신 후에 배가 아파서 곤란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껏 애써 모른 체하던 걸 확실하게 선고받은 것 같았다.
죄명: 수음 체질. 피고인을 평생 찬 음식을 못 먹는 벌에 처한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여기 '해로운 음식'을 아예 안 먹으라는 건 아니에요. 그럴 수도 없죠. 괜히 이거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10번 먹을 걸 7번, 3번으로 줄이기만 해도 돼요."
단순히 '과민성 대장증후군'에서 '과민성 대장증후군 X수음 체질'형 인간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그만큼 식단도 '저포드맵'식단에서 '저포드맵 X수음 체질' 식단으로 바꾸... 려고 했는데 사실 잘 되지 않았다. 수음 체질에게 유익한데 고포드맵인 음식도 많아서(차, 견과류 등) 완전히 수음 체질 식단을 반영하기 어려웠다. 대신, 저포드맵 음식에서 '찬 음식'과 '돼지고기'만 덜어냈다. 내가 브런치에서 소개하는 레시피도 소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 있지만, 수음 체질이 아니라면 혹은 수음 체질인지 뭐시기인지 상관없다면 내 레시피에서 고기만 돼지고기로 변경해도 괜찮다.
이젠 낮에도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분다. 수음 체질은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게 좋다는데 선선한 바람이 내 장의 열기도 식혀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