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추석 나기 1
사실 이번 추석 연휴엔 정말이지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연휴 전날까지 스케줄 표를 가득 채운 프로젝트로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고, 그럴수록 내 장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지금보다 상황이 괜찮았던 몇 주 전에 애인과 동해에 가자고 약속을 했던 것과 부모님에게 여행 갔다가 바로 본가로 가겠다고 얘기한 것이 후회됐다. 이제 와서 모든 약속을 무를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점심시간에 가장 중요한 여행 준비물을 챙기러 병원에 갔다. 의사에게 '과민성 대장증후군(Irritable Bowel Syndrome IBS)'으로 결론지어질 증상들을 말했다.
"약에 의존하지 말아요. 약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먹어요."
의사는 약을 처방하며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제갈량에게 묘책이 든 비단 주머니를 받은 양의처럼 약을 소중하게 손에 꽉 쥐고 병원을 나섰다.
오후 다섯 시, 애인이 나를 데리러 회사에 왔다. 동해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고, 바닷가에서 동트는 걸 보고 오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나는 다섯 시까지 끝났어야 할 일이 여섯 시로 미뤄지고, 일곱 시까지 미뤄지고, 결국 일곱 시 반이 넘어서야 애인의 차에 탔다. 애인이 내비게이션에 동해 수산시장을 목적지로 찍었다. 모든 경로가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나는 약봉지 하나를 뜯었다. '이걸 벌써 뜯으면 어떡하지' 고민도 잠시, 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나는 알았다. 지금 화장실에 가도 나올 것도 없다. 나를 순순히 바닷가로 보내지 않으려는 대장의 장단에 맞추지 않기 위해 나는 약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새끼손톱만 한 두 알약의 힘을 믿으며 약봉지를 입에 털었다. 물도 없었기 때문에 연신 침을 꼴딱꼴딱 삼켜야 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대장도 금방 잠잠해질 것 같았다.
"미안한데 나 의자 좀 젖혀도 될까?"
무슨 일이 있어도 조수석에서 졸지 않는 내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었는지, 아니면 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봤는지 애인은 그러라고 했다.
"미안해. 차 막히는 거 보고 있는 게 힘드네."
용산역에서 강변북로를 타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평소엔 10분이면 지나갈 거리였다.)
"하늘이라도 좀 봐. 눈 감고 그냥 자도 돼. 며칠 동안 야근해서 힘들 텐데.”
애인이 선루프를 열어주었다. 어느새 해가 져서 하늘이 깜깜했다. 사방으로 늘어진 차만 보느라 해가 진 줄도 몰랐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눈을 감으면 컴컴한 시야에서 선명하게 불안이 떠올랐다. 양이라도 세려고 하면, 양이 똥을 싸고 지나갔다. 별이라도 세려고 하면, 별이 강변북로를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반짝이며 이렇게 속삭였다.
‘화장실 가고 싶지? 그냥 돌아가. 여기서 빠져나가면 돼. 여기 지나면 또 언제 빠질 수 있을지 몰라. 여기 지나쳤다가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어? 지나치는 거야? 괜찮겠어? … … 봐봐. 다시 화장실 가고 싶어 졌잖아. 다음엔 꼭 빠져나가야 한다.’
강변북로를 얼마간 달린 후에 용비교를 건널 때 서울숲으로 빠지는 표지판이 보였다. 내가 아는 길이었다. 여기서 나가면 스타벅스가 있다.
“미안한데 나 잠깐 화장실 갔다 가도 될까?”
“그럴까? 여기서 나가면 되겠다.”
애인이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차선을 바꿨다. 별이 이번엔 동해 가는 방향으로 반짝였다.
‘나가려고? 너 이번에 나가면 오늘 동해 못 가는 거야. 이렇게 해서 어딜 가려고.’
“아니다. 그냥 가자. 나가지 말자.”
애인은 급하게 다시 동해 쪽으로 방향을 틀으려고 깜빡이를 켰다. 그때, 배가 다시 부글거렸다.
"아냐. 그냥 화장실 들렀다 가자."
애인은 핸들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못 돌리다가 동해도 서울숲도 아닌 성수대교 방향으로 향했다.
“이재야. 그렇게 갑자기 얘기하면 내가 방향을 바꾸기 힘들어.”
애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는 목울대에 차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띄엄띄엄 말했다. 장은 제2의 뇌라던데, 이젠 장이 눈물샘까지 예민하게 만든 것 같았다.
“많이 아프면 그냥 돌아갈까?”
애인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내 목소리는 울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장을 탓했다. 우리의 여행을 망친 건 내가 아니라 장이었다. 장을 떼어서 집에 두고 올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내 장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만큼 내가 애인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도저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장은 '내 것' 같지도 않은데, 얘 때문에 계속 나만 사과를 해야 했다. 장에게 입이 있으면 나와서 얘기 좀 해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오늘 점심에 죽 먹고, 차 타기 전에 약까지 먹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고 싶었다.
애인은 압구정으로 빠졌다. 나는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인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다시 검색하기 위해 거치대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화장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느라 애인이 뭘 하려는지도 몰랐다. 애인은 한 손엔 핸들을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난감해하다가 작은 한숨을 쉬며 나를 불렀다.
“이재야.”
나는 애인의 핸드폰을 받아 내비게이션을 켰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까 똥 생각이 났다. 다시 창 밖을 바라봤다.
“그냥 아무 데나 잠깐 세워서 네가 보면 안 될까? 미안해.”
애인은 아까보다 조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에도 아쉬우니 압구정 갤러리아에 들러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에도 10분 걸린다고 나왔다. 10분은 괜찮을 거 같았다.
5 분 후, 나는 압구정 거리 한복판에서 애인에게 차 좀 세워달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보인 오래된 건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카페에 들어가서 '정말 죄송한데 화장실만 잠깐 쓰려고 한다’고 얘기했다. 매장 주인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커피 살게요. 죄송해요.” 내가 얘기했다. “됐어요. 어차피 이제 곧 마감이에요.” 나는 다시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그래도 화장실이었다. 다행이었다.
우리가 갤러리아 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8시였다.
"주차장이 왜 이렇게 비었지? 이재야, 여기 폐장 시간 언젠지 봐봐."
"8시 30분인가 봐."
내가 주차장 안내 데스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서둘러 매장으로 들어갔다.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나는 배 아플까봐 못 먹겠어."
“음식점은 이미 마감 시작했네."
애인이 눈으로 매장을 금방 둘러보더니 말했다.
“과자라도 살까?”
“그냥 집에 가서 시켜 먹을게.”
“그래.”
애인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근데,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 혹시 몰라서…….”
나는 애인을 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응.”
갤러리아 화장실은 쾌적했다. 나는 손을 씻으며 거울을 봤다. 누가 봐도 눈물을 쏟은 눈이었다. 그나마 마스크가 빨간 코를 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망망대해 같던 도로 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는 초능력은 순간이동이었다. 우리 집은 왜 강남이 아닐까. 그런데 과연 애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수석에 앉아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우는 나를 보며 애인은 뭐라고 생각할까. 분명 사랑스럽진 않겠지. 조금 서글퍼졌다.
집에 가는 길은 다행히 막히지 않았다. 아까 그 난리가 다 꿈같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동해에 다시 가자고 하기에는 아까 그 난리는 다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일 또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일, 나는 본가로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