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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Oct 07. 2021

가족이 이해해주지 않으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의 추석 나기 2

추석 연휴에 본가에 가는 길은 전혀 기대되지 않았지만 본가에 가서 먹을 엄마 밥은 기다려졌다. 나는 자타공인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었지만 가끔은 집 밥이 그리웠다. 뜨거울 불 앞에서 죽을 끓일 때, 야근하고 집에 와서 과자를 저녁으로 먹을 때 특히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만든 비법 볶음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열두 시 반이었다. 오후가 아니라 오전. 한 낮이 아닌 한 밤. 용산에서 김포는 안 막히면 삼십 분밖에 안 걸리지만, 어제처럼 막힐까 봐 걱정되어서 오빠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다행히 근처에서 일이 늦게 끝난 오빠가 데리러 왔다. 열두 시 강변북로는 겨울 바다 같았다. 사람이 없는 자리를 바람이 메우고 지나갔다. 요즘엔 술집도 열 시면 영업이 끝나니 지금 집에 가는 사람들은 나처럼 도로가 한산해지길 기다린 것 같았다.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차를 보며 '화장실이 급한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요즘 그 생각밖에 안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마중 나온 엄마를 앉혀두고 나는 연신 말했다.

"나, 이렇게 해서는 산소에 못 가. 어제 동해도 못 갔고 오늘 집도 겨우 왔어요. 산소는 정말 못 가."

"아이고, 어떡하니. 아파서 어떡해."

우리 가족에게 산소 가는 일은 성묘보다는 소풍에 가까웠다. 산 위에서 햇빛가리개를 치고 캠핑의자에 앉아서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그게 아무리 산소 옆이더라도 최고의 소풍이었다. 게다가 나는 외할머니 산소에 가는 날엔 좋은 소식을 듣는 징크스도 있었지만, 징크스에 모든 걸 걸기엔 내 장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너무 컸다.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가야지."

나는 산소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잠을 자러 들어갔다.

"내일 점심은 수산시장 가려고 했는데 거긴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뒤에서 나직이 엄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아침은 전복죽이었다. 볶음밥을 기대해서 처음엔 아쉬웠는데, 먹기 좋게 손질된 전복이 뭉텅이로 들어가 있는 걸 보곤 그런 생각이 싹 없어졌다. 게다가 전복인 척하는 버섯이 하나도 없는 것도 좋았다. 무언가 물컹하게 씹힌다면, 그건 다 전복이었다. 전복과 밥을 고루 섞기 위해 숟가락으로 죽을 휘젓다가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쌀과 함께 굴러다니는 걸 봤다. 아주 작고 투명한 양파 조각이었다. 나는 죽에서 양파로 보이는 것들을 모두 한쪽으로 건져내려고 했지만 너무 작고 너무 많아서 차라리 쌀을 골라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나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걸린 이후로 계속 저포드맵(low FODMAP) 식단을 먹었다. 고포드맵(high FODMAP) 음식은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는 장을 더 예민하게 만들어서,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


나는 조용히 엄마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어찌어찌 죽을 다 먹더라도, 오늘 점심도, 저녁도, 내일도, 계속 양파를 먹을 순 없었다.

"나 양파 못 먹는데......."

내 앞에 놓인 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파도 고포드 맵 음식이라서 먹으면 속이 불편해요."

"이재야, 그 정도는 괜찮아."

아빠가 웃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진짜로. 진짜 저한테는 안 좋대요."

나는 별 일이라는 티를 내기 위해 짐짓 인상을 쓰고 말했다.

"구운 거라서 괜찮아."

엄마가 나를 안심시키려 말했지만, 전혀 안심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늘 점심도, 저녁도, 내일도, 내가 본가에 있는 내내 나는 양파를 먹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부모님과 오빠는 산소 갈 준비 하느라 분주하고 나는 멀뚱멀뚱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산소 갔다 오면 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갈 거니까 너도 준비하고 있어."

내가 망부석처럼 그대로 소파에만 있을 거 같았는지 엄마가 당부했다.

"근데 수산시장은 여기서 얼마나 걸려요?"

"안 막히면 20분."

아빠는 항상 슈마허가 운전하는 차를 기준으로 시간을 말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내비게이션 어플에 수산시장을 검색해봤다. 가는 길이 내내 빨간색이었다.
"40분 걸리는데......."

"산소 갔다 오면 좀 풀릴 거야. 괜찮아."

아빠가 다시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체는 그렇게 쉽게 풀릴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과 오빠가 집에 돌아왔지만 내비게이션엔 이동시간이 35분으로 나왔다. 가기에도, 안 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갈 수 있겠어?"

엄마가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오늘 어디를 가야 가족 모두가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심하고 다 같이 수산시장에 갈 생각에 설렜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과민성 대장증후군 약을 삼켰다. 그 약이 마치 수면제라도 되는 듯 나는 장한테 제발 단 몇 시간만이라도 잠들어 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나 손에 땀 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엄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도 금방 다시 땀이 찼다. 발도 땀 때문에 미끄러워서 슬리퍼가 자꾸 헛돌았다. 땀이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았고, 몸에는 한기가 들었다.

"아이고. 힘들면 가지 말자."

내 손에 난 땀을 엄마가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아빠가 오 분에 한 번씩 화장실 찾아줄게."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정말 그럴 사람이었다. 몇 년 전(아직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때) 부모님과 차를 타고 가다가 화장실이 급했던 적이 있다. 꽉 막힌 강변북로에서 아빠가 내게 말했다.

"이재야. 여기서 5분만 가면 주유소 나오거든? 5분만 참으면 돼."

그리고 그 주유소에 다다랐을 때 아빠가 다시 얘기했다.

"이재야. 여기서 100미터만 더 가면 더 깨끗한 주유소 화장실 나오거든? 거기까지 참을 수 있겠어?"

아빠가 마치 지구를 구하는 용사처럼 비장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 다급한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그리고 두 번째 화장실은 정말 주유소치곤 깨끗했다. 그땐 아빠의 '괜찮을 거야'라는 말이 내게 힘이 됐다. 아빠는 나보다 운전을 잘하고 화장실 위치까지 잘 알았기 때문에 아빠가 괜찮다면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 병을 겪어본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이 병에 대해 공부한 사람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나였다.


오빠가 차를 빼자 엄마 아빠가 뒷자리에 앉고 나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타고 싶지 않았다.

"이재, 괜찮은 거야?"

오빠가 물었다.

"괜찮아. 이재야. 걱정하지 마."

아빠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차가 출발했다. 익숙한 동네에서 벗어나 금방 낯선 도로로 들어섰다. 부모님이 김포로 이사 가신 후에는 줄곧 집을 나가 살아서 본가가 있는 동네 말고는 아는 곳이 없었다. 강변북로도 올림픽대로도 아닌 한강 옆 작은 도로를 지나자 8차선 도로가 이어졌다.

"이재야."

아빠가 뒤에서 불렀다.

"아빠도 예전에 그런 적 있었어. 에어컨 바람이 배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게 좋아."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런 게 아니야. 아빠."

'나도 배에 찬 바람 들어가서 배 아픈 적도 있었어. 만약에 그래서 아픈 거라면 옷을 따뜻하게 하면 배가 안 아파야 하잖아. 근데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더워서 배가 아프고, 옷을 춥게 입으면 추워서 배가 아프고, 지하철을 타면 답답해서 배가 아프고, 버스를 타면 불안해서 배가 아파. 지금 내 짧은 상의를 탓하는 거라면 아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잖아."

머릿속 생각과 달리 파편적인 말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빠는 내가 아니잖아."

"나처럼 아픈 적도 없었잖아."

오늘은 정말로 안 울려고 했는데. 나는 또 조수석에서 화장실 가겠다고 우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울음이 많이 지는 게 과민성 대장 증후군 증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내가 아프다고 했잖아, 힘들다고 했잖아."

"아빠가 왜 자꾸 괜찮대. 내가 안 괜찮다는데."

나는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한참을 훌쩍거렸다.

"아휴. 집에 가. 그렇게 아픈데. 어떡해."

엄마가 말했다.

"저 쪽으로 빠져나가면 되죠?"

오빠가 되돌아가는 길로 핸들을 틀었다.

"집에서 뭐 시켜먹을까?"

"훌쩍"

"우리 동네에서 먹어도 되고."

"훌쩍."

"아니, 그냥 집에서 편하게 시켜먹자."

"훌쩍."

"어, 저기. 저기 갈까?"

"응."


우리는 장어구이 가게에 들어갔다. 나는 장어 가격을 보고 놀랐다. 괜히 나 때문에 부모님이 돈을 더 쓰는 걸까 봐 죄송했는데, (내가 살 생각은 안 하고) 엄마는 오히려 수산시장보다 여기가 싸다고 했다. 게다가 아빠는 회보다 장어를 더 좋아했고, 오빠는 멀리 운전 안 해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소스에 생강을 넣어 먹어야 맛있어."

아빠가 종지에 소스와 생강을 넣고 젓가락으로 휘저어 고루 섞은 후 내게 건넸다.

"생강도 고포드맵이라서 안 먹을래요."

"그러니? 알겠다."

이 때는 정말 생강이 고포드맵 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저포드맵이었다.(아빠 미안.) 어쩌면 뭐가 저포드맵이고 고포드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내 장이 이해되지 않는데 하루 만에 아빠가 그걸 이해해주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가 주길 바랬다. 아프다면 아픈가 보구나, 못 먹는다면 그런가 보구나, 힘들다면 힘든가 보구나, 하고.


지난 몇 년간 내 맘대로 살다가 오랜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니까 마치 송충이 껍데기를 다시 입는 나비 같았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어서 좋았지만 그게 내가 원한 음식은 아니었고, 가족과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몸이 받아주질 않았다.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실로 엮어진 송충이 껍질은 더 이상 내게 맞지 않아 불편했다. 그래도 가족과 하루 종일 부대끼다 보니 사랑의 모양도 서로를 위해 맞춰졌다. 아마도 나비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고, 그때마다 집은 성장통을 겪을지언정 달라진 나비에 따라 변할 것이다. 다시 날아갈 나비가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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