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서.
회사보다 집에서 일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회사 근처 내과가 아닌 집 근처 내과를 찾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에게 어디서부터 내 병을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벙쪘다.
"반년 전에 장염에 걸렸었는데..."
내 병은 확실히 현재 진행형은 아니었다. 과거 완료와 과거형, 미래형과 가정법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 후로 화장실 없는 곳에 가거나 답답한 곳에 가거나 아니면 그냥 집을 나가려고 하면 배가 아파요."
선생님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 미소가 내 증상을 비웃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여기 오는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뭐라고 대답할까? ‘배가 아파서 왔어요. 속이 안 좋아서요. 소화가 잘 안돼요.’ 이런 대답은 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아픈 게 아니었다. ‘지금 아프진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파요. 아마 아프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렇더라도 아플까 봐 불안해요.' 생각할수록 아플까 봐 병원을 찾는다는 게 이상하게 들렸다.
"본인 장이 정말 아픈 거 같아요?"
"네?"
"병리적인 게 아니에요. 병리적인 건 장소와 시간에 따라 아프고 안 아프고 할 수 없어요."
나는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친구와 삼겹살 집에 갔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이거 심리적인 건 아니야?"
그날도 나는 친구가 저녁을 먹는 동안 화장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리며 식은땀만 빼고 있었다. 친구는 2인분을 거의 혼자 다 먹었기 때문에 배부른지 고기 몇 점을 남겼다. 나는 식어가는 삼겹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 익은 고기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데 이게 어떻게 심리적인 거야. 정말 아픈 게 아니라면 어떻게 고기를 남길 수 있겠어.'
"그런데 정말 설사를 할 때도 있어요."
의사 선생님에게 내 병의 실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혹시 음식을 잘못 드셨어요? 자극적이거나 맵거나 기름진 음식이요."
"약간 매운 음식을 먹긴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맵진 않았어요. 약간 매웠는데......."
"한번 장의 장벽이 망가진 상태니까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어요. 그런 상태에서는 예전에 잘 먹던 음식도 안 좋을 수 있어요. 예전 기준이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 속을 불편하게 하는 음식을 멀리 하세요."
"네."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걸린 이후로는 식단 일기를 쓰고 있었다. 한 번도 다이어트를 위해서 식단 관리를 한 적도 식단일기를 쓴 적도 없었는데 대장 일기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간식으로 먹은 것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날의 장 상태를 적었다. 그리고 장 상태가 안 좋은 날이면 이전에 먹었던 음식을 복기하며 '나쁜 음식'을 찾아냈다. 며칠 전에 설사를 했을 때도 그나마 범인이라고 할만한 음식이 '양념장에 비벼 먹은 참치 볶음밥'이었다. 양념장이 많았나? 그게 조금 매웠던 걸까?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 같아요?"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네... 약을 갖고 있다가 배 아플 거 같거나 멀리 나가야 할 때 미리 먹었어요. 먹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답은 '아니요'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네'라고 대답해야 했다. 나는 약이 필요했다.
"약에 의존하면 안 돼요. 심리적인 문제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괜찮아져요."
선생님은 거듭 병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식단일기에 "CAN DO", 할 수 있는 것을 적는 란을 추가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아프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하철도 못 타고 공원도 못 걸어.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어.' 하고 나서 배가 아팠던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아서 강박적으로 피했고, 내 세상은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해낸 것들이 있었다. 두세 정거장에 한 번 씩 내려서 숨을 골라야 했지만 그래도 집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고, 공원은 못 거닐어도 마트까지 걸어서 갔다 올 수는 있었다. 추석에 본가에서 집으로 올라올 때는 내가 차를 운전해서 가야 했었는데, 차를 타자마자 숨이 턱턱 막혔고 금방이라도 화장실로 뛰어가고 싶었다. 온몸으로 내가 불안하다는 신호가 느껴졌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
"도로 위에서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어떡해? 내가 패닉 돼서 갑자기 차를 멈추거나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참으면 돼. 못 참겠으면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아서 잠깐 멈추고 화장실을 찾으면 돼. 그것도 못하겠으면 그냥 싸면 돼. 어차피 너 혼자 있잖아. 깨끗이 치우고 페브리즈까지 뿌리고 나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래도 티가 난다면 친구 아이를 태우다가 기저귀를 흘렸다고 해버려. 뭐가 문제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답답하다고 내내 열어놨던 창문을 닫을 수 있었고,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그럼에도 집 가는 동안 장이 불편해지고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래. 여차하면 그냥 싸버리지 뭐.'라고 생각했고, 그 덕분인지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여태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곤란하고 힘들었어.'라고 내 이야기를 기억했었는데, 사실 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적 없었다. '곤란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찌저찌해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어.' 곤란한 순간은 어떻게든 지나갔고, 하루의 끝엔 집에 있는 내가 있었다.
무기력한 사람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작은 습관 중에 하나가 '한 일'을 적는 것이라고 한다. 할 일(To Do List)이 아니라 한 일(Done List)을 적는 것. 장을 봤고, 요리를 했고, 밥을 먹었고, 하는 식으로 작은 일이지만 내가 오늘 한 일을 적다 보면 성취감과 뿌듯함이 들어 다른 일도 해나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나의 경우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지만 한 일'이었다. 그동안 과민성 대장증후군 때문에 못 했던 일을 해내거나 배가 아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었던 일들을 'CAN DO'리스트에 적었다. 그리고 이젠 이 리스트는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처방전이 되었다. 집 밖에서 또 숨이 가빠오고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약봉지를 뜯는 대신에 노션을 열어 'CAN DO'리스트를 봤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거기까지는 버틸 힘이 생겼고, 거기까지 버티다 보면 대부분 괜찮아졌다.
그동안 '할 수 없는 것'만 보느라 좁아진 내 세상을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아니, 원래보다 더 크게 넓힐 것이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까.
(노션 대장 일기 템플릿 링크) < 저처럼 대장 일기를 쓰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공유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