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회적 맥락에서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
테레자는 역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파트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배가 갑자기 끔찍한 꾸르륵 소리를 냈다. 그녀는 부끄러웠다. 마치 어머니가 배 속에 들어앉아 그녀의 만남을 망치기 위해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엉뚱한 소리 때문에 그녀는 토마시가 자신을 내쫓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는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테레자는 그녀의 꾸르륵 소리를 눈감아 준 그가 고마웠고 그래서 그를 더욱 정열적으로 껴안았다.
위 내용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일부분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 장면을 두고 '인간의 근본적 체험, 즉 영혼과 육체 간의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이 급작스럽게 드러난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 시대에도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은 그저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일 뿐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테레자는 영혼을 좇아 낯선 도시로 왔지만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육체가 낸 끔찍한 소리 때문에 사랑하는 이로부터 쫓겨날지도 모를 불안을 느꼈다. 테레자의 '배'는 테레자를 토마시의 집으로 이끈 그녀의 다리처럼 영혼으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주 조금의 눈치도 없이 육체는 육체의 일을 했다.
영국의 목사이자 시인인 조지 허버트는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떨리는 가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을 말했다. 이런 건 기침처럼 우리의 의식으로 조절될 수 없다. 내가 장에게 '출근 10분 전이야. 회사에서 화장실 가기 불편하니까 지금 당장 장운동을 시작해!'라고 명령을 하면 오히려 장은 멈춰버리고 마는 것처럼, 영혼과 달리 생리현상은 우리 자신을 주어로 두지 않았다. 생리현상은 말 그대로 '현상'이었다. 만약 밀란 쿤데라가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겪었다면, 육체와 영혼이 내는 불협화음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꽉 막힌 도로 위나, 산 중턱, 중요한 미팅 중간에 갑자기 신호를 보내는 장은 테레자의 '꾸르륵 소리를 내는 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겪을수록 영혼과 육체가 단일성을 보였다. 다만, 영혼에서 육체의 방향이 아니라, 육체에서 영혼의 방향으로. 장은 실제로 뇌와 척수가 관여하는 중추신경계가 아닌 별도의 신경계로 장운동을 조절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필요한 음식은 소화하고 위험한 것은 구토나 설사를 통해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겪으면서 장이 단순히 대장 운동만 조절하는 게 아니라 내 감정까지도 조절했다.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가니까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해졌고, 결국 불안을 잠재우려면 집 밖에 안 나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친구들도 안 만나고 집에만 있다 보면 나는 집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똥만 기다리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우울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장은 감정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2014년 영국 과학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에는 장내 미생물이 기분에 관여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가바(GABA)를 조절해 스트레스를 제거한다는 글이 실렸고, 다음 해 국제 학술지 <셀>에는 장내 미생물이 만들어낸 부산물이 세로토닌(뇌에서 기분 조절 기능을 하는 신경전달물질) 분비량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제2의 뇌라고 불리는 장은 똥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분이 똥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병든 육체는 병 들어가는 영혼을 투과시켰다.
의사 선생님이 내게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장염은 장의 장벽만 무너뜨렸지만 그 후의 일들은 정신을 무너뜨렸다. 그 상태에서 내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아플 때마다 약을 먹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아니었다. 나는 불안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상담 대신 약물만 처방하는 의사처럼 스스로에게 약봉지를 건넸다.
1960년대-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적 신분 상승의 대열에서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이 팽배하던 시대-에 '사회불안'이 정신의학의 바이블이라는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 포함되면서 정신 장애로 인정되었다. 성가신 감정과 생각은 신경화학물질의 혼돈(화학적 불균형 chemical imbalanc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의 시작이었으며, 불안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상담 대신 약물 처방을 받는 것의 시작이었다. 그건 마치 수학 문제를 풀다가 막혔을 때 답지에서 답만 보고 베끼는 것 같았다. 답지에서 '해설'이라도 보고 어디에서 막혔는지, 왜 틀렸는지, 확인했으면 다음에 같은 문제를 마주쳤을 때 혼자 다시 풀어볼 수 있었을 텐데, 답만 보고 말았으니 비슷한 문제를 마주쳤을 때 이번엔 풀어볼 생각도 않고 바로 또 답지를 보러 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적절한 쟁점에 대해 적절한 방법으로 걱정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궁극적인 교훈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키르케고르가 답지에서 '해설'을 적었다면 '불안과 두려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슬을 끊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단호히 적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와 그 이후의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불안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인정하고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또 니체는 우리에게 닥치는 위험과 시련을 피하지 말라고, 그런 시련은 진정한 자아가 되는 지름길이므로 그런 시련을 벗어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직면한 이 불안을 단순히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박준규 부교수는 한 서평에서 "자율적 개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행동의 의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문화적 체계를 경유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빅토르 세르주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살지 못한다. 혼자서는 결코 살지 못한다.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개인적인 사고도 수많은 연결고리에 의해 세상의 사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정 질병이 특정 집단에게서 많이 발생한다면 그건 더더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전에 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결핵은 도시 빈곤지역에서 자주 발생했고, 2005년 난민사태 이후로는 이민자들에게서 많이 발생했다. 이런 현상은 결핵이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 걸릴 확률이 높고, 비위생적인 거주환경 및 근무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전체 섭식장애 환자 중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4:1, 과민성 대장증후군 비율은 2:1로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의학 전문가들은 섭식장애가 여성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로 마른 몸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회문화적 시선을 꼽았으며,**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걸린 여성 중 51%는 성적 학대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의 어머니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라고 나온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이제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지만, 테레자는 아니었다. 테레자는 자신의 가치가 자신이 읽은 책에서 나온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내세울 만한 건 젊음과 아름다움 밖에 없었다. 어쩌면 테레자의 배가 토마시 앞에서 '꾸르륵' 소리를 낸 장면 뒤편에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테레자가 하루 종일 굶었다는 이야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Ref.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고든 마리노
<치료적 자아를 통한 성장 - '무드 경제'와 한국사회> 박준규 (릿터 2021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