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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유에서 슬픔을 외치다

by 은수달

장시간 노동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혀 있는 우리네 삶의 질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장시간 노동은 우리의 삶을 고갈시키고 일상 관계를 무너뜨린다. 사랑할 여유마저 빼앗고 존재의 영원성까지 잃게 한다. 과로 사회는 일종의 여가 없는 나라다.


-김영선, <과로 사회>


이십 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키우다가 최근에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한 지인이 있다. 그녀는 열정과 재능이 많지만, '경단녀'라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운 좋게 취직해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지금은 간호조무사 수업을 들으며 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남은 생을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가길 응원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유로운 삶을 누리려면 육아와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육아전쟁에 발을 들이는 순간, 경단녀 혹은 승진포기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해야 한다. 아내 대신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동료뿐만 아니라 상사의 눈밖에 나고, 승진은 물 건너간 남자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위 20프로 안에 드는 중상위층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피로'나 '과로'를 담보로 삼아야 한다. 평균노동시간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남들만큼이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왜 우린 피로하다 못해 과로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 걸까. 대기업에서 잘 나가는 지인을 부러워한 적 있는가. 배우자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친구를 시기한 적은.


최근 몇 년 동안 '피로누적'이라는 진단을 4번이나 받았다. 눈밑 떨림도, 불면증도, 편두통도 피로 때문이란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투잡이야 이십 대 때부터 꾸준히 했었고, 직장 다니면서 힘든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지만 내 몸에선 적극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일잘러이자 워커 홀릭인 나의 뇌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일에 몰두하고 집착한 걸까. 나는 왜 과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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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퇴근 없는 육아에 비하면 나의 삶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워킹맘으로 일하는 친구나 지인들을 보면 여유라고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나마 주어진 자유는 애들 재우고 난 뒤 잠깐의 시간, 남편이 애를 대신 봐주면 즐길 수 있는 아주 잠시의 외출. 그마저도 배우자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꿈도 못 꾸는 삶이다. 정부에서는 출산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도 실제로 맞벌이 부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는 외면하고 있다. 힘들게 쌓아온 경력이 육아로 인해 단절되다 못해 지하에 묻힌다는 걸 짐작이나 할까.


출산 지연이나 회피에는 육아로 환원될 수 없는, 미래가 주는 두려움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노동 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경력 단절과 사회 단절의 불안이 배가됐기 때문이다. (과로 사회, 47쪽)


쥐꼬리만 한 지원금과 눈 가리고 아웅 하기 식의 정책을 믿고 미래를 내주기에는 우리 사회 자체가 너무나 불안정하다. 있는 자리마저 빼앗기는 시대인데, 이를 악물고 버텨도 자유를 지키기 어려운 세상인데,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슬픔과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사회적 가치로 환원하라고 강요받고 있다. 어느 사회주의자의 말처럼, 우리에겐 혼자 있거나 '주체적으로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창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근육과 감각을 움직일 시간이 필요하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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