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화가 많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의심이 많거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왜 그렇게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집착하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연습을 해봤으면 좋겠어."
하나부터 열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뭔가를 결정하고 나서도 불안해하는 누군가에게 해줬던 말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나치게 의식하면 신경증에 걸리고, 무시하면 이기주의자나 소시오패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연스럽지만, 그럼에도 지적인 해악이다.
-버트런드 러셀,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전적으로 확실한 것 또한 거의 없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이면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 내일 갑자기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불신이 강하거나 통제 강박이 심할수록 확실한 무언가를 원한다.
"그래서 확실히 내일까지 오는 거지?"
"도착 예정일이 내일이라고 했으니까 그때는 오지 않을까요?"
내가 직접 배송하는 것도 아닌데,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한 사장님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살짝 돌려서 말했다. 제 날짜에 도착하지 않으면 내 탓을 할 게 99퍼센트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Unsplash의 Annie Spratt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분노의 화살이 곧장 타인에게로 향한다. 미세먼지도 대통령 탓을 하는 어느 커뮤니티의 글을 보면서 어이가 없는 한편, 분노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스트레스가 많은 아빠는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를 탓하고, 엄마는 죄 없는 아이한테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억울함을 꾹꾹 누른 채 자란 아이는 커서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기 쉽다. 그래서 자녀한테 감정을 실어 화를 분출하는 대신 침착하게 타이르거나 설득해야 한다.
"방금 누나한테 소리 지르고 때렸지?"
막내 조카의 양 어깨를 붙잡은 채 단호하게 묻자, 조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함부로 대하는 존재가 아니야. 존중해 주고 아껴줘야지. 이모 말 알겠어?"
본인의 잘못을 상기시켜 주되,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훈육의 효과가 아닐까.
툭하면 신경질을 내거나 화가 난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자. 자신 안에 어떤 열등감이나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건지. 그리고 상대가 그런 성향을 가졌다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성'이라는 도구로 화부터 가라앉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