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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달 Sep 06. 2024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말이나 분류표로 세상을 덮지 않을 때

잃어버린 감각이 삶에 되돌아온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가 저절로 나타난다.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우리는 너무 많은 자아와 요구의 목소리 속에서 진정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이 벌어야 해,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해,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해 등등. 하지만 '더 많음'과 '더 좋음'에 과연 한계가 있을까. 톨레의 말처럼, 에고의 만족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찾거나 소비한다.


'딩동'하는 배송 알람 소리에 들뜬 적 있는가. TV 광고를 보면서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간 적은. 유명 연예인이 입은 옷이나 액세서리를 산 적이 종종 있다면 당신은 거짓 에고(ego)한테 속은 셈이다.



에고의 구조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한, 당신은 어떤 내용물에도 만족할 수 없다. 무엇을 손에 넣든 행복해지지 못한다. 언제나 더 큰 만족감을 약속하는, 그리고 불완전한 자아의식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내면의 결핍감을 채워준다고 약속하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위의 책, 79-80쪽)


우린 어릴 적부터 성적이나 성과로 평가받지만,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죄책감이나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고 요구받는다.


"늦은 시간에 꼭 날 택시에 태워 보내야겠어?"

"야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그래.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니?"


데이트 후 매번 여자를 자가용으로 집까지 바래다주던 남자는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게 된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바래다주는 것이 당연한 걸까? 우리는 왜 상대한테 지나친 걸 바라거나 당연하게 요구하는 걸까?


우리는 관계의 프레임 속에 갇혀서 상대뿐만 아니라 스스로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기념일이나 명절에 다투는 것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하녀 취급하는 것도, 상대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집착하는 것도 결국 지나친 동일화로 인해 존재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에고는 무형의 의식인 '나의 있음' 즉 '순수한 있음(being)'이 형상과 뒤섞일 때 생겨난다. 이것이 존재의 망각이며, 근본적인 실수이고, 존재가 개별적인 형상들로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다. 이것이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놓는다." (톨레, 85-86쪽)


자신의 역할과 동일화될수록 관계의 진정성은 사라진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당신의 '순수한 있음'을 알아볼 때 그 알아봄이 이 세상 속으로 두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가져다준다.


관계 속에서 자아는 한없이 강해지거나 비참할 정도로 약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를 통해 힘을 드러내거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관중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힘의 우위로 인해 관중으로 밀려나거나 무대에 설 자신이 없어서 관중으로 남을 뿐이다. 니체가 얘기한 '힘에의 의지'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채 현생을 떠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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