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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ul 23. 2021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예측을 빗나가는 일상 살아내기

학기 중에는 늘 수업과 과제에 치여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살다가, 종강을 앞둔 시점이 다다르면 헉! 벌써 이렇게? 하고 놀랄 때가 태반이다. 종강 직후였던 지난 6월은 유학생으로서 내 삶이 시작된 지 정확히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말은 곧 졸업까지 최소 2년 반에서 길게는 3년 반이 남았다는 뜻이고, 남은 1년 안에 QP (Qualifying Paper) 2편과 졸업논문 주제를 확정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첫 학기부터 쭉 뭔가 계속해서 열심히 달려오긴 했는데, 돌이켜보니 뭔가 이뤄놓은 게 없는 느낌이 든 나는 조바심이 들어 여름방학 동안 최대한 많은 진도를 빼놓자 결심하고 가열차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첫 QP를 완성하고 두 번째 QP 주제도 최대한 잡아둔 채 새 학기를 맞이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지난 학기에 쓴 final paper를 발전시켜서 써야겠다 마음먹고 차분히 진행하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흘러가면 그건 인생이 아니지!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국에서 약 1년간 12개월 아동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연구라는 게 얼마나 초기 계획대로 흘러가기 힘든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제 힘으로 의자에 앉지도 못하는 아가들은 부모의 무릎에 앉아서만 실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아직 말도 하기 전이니 당연히 실험자인 내 설명이나 안내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기들의 실험 참여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스스로의 식욕과 수면욕뿐이었기에, 세팅에 15분, 실험 진행에 10분, 총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실험은 늘 종료 시간까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뉴스데스크 생방송과도 같았다. 병원 코앞까지 와서 접촉사고를 당해 실험실에 오지 못하는 부모도 있었고, 기껏 다 해놓고 막판에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전까지 저장된 데이터를 날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에 4-5명 아이들을 실험하는 예정으로 시작되어도 늘 끝나고 보면 그날 건진 데이터는 1-2명인 경우도 수두룩했다.


그래, 그랬다. 그러니 지난 학기 말에 내가 세웠던 여름방학 계획도 어찌 보면 아주 야망에 찬, 야심 찬 계획이었던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난관은 실험을 함에 앞서 학교로부터 IRB 승인을 받는 절차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연구는 아직 IRB 승인도 받지 못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모든 연구는 IRB(Institutional Review Board)라 하여 해당 연구가 그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 연구를 그대로 진행해도 된다는 승인받아야만 한다. 승인 전에는 파일럿 실험도 할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결과를 얻는다 해도 IRB 승인을 받지 않은 연구는 어떠한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실을 수도 없고 학술대회에서 발표도 당연히 할 수 없다.


IRB 심사와 승인은 통상 해당 연구를 주로 진행하는 학교에서 받게 되는데, 이 IRB 심사 신청서도 아무나 쓸 수 없고 해당 학교에서 제공하는 관련 교육을 모두 이수한 사람만이 작성할 수 있다. 운전면허를 따야만 차에 올라 운전을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면허와 다른 점이 있다면 IRB 교육은 이수 후에도 2년마다 다시 교육을 듣고 갱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방식은 기관마다 상이하지만 대부분 이수자 편의에 맞게 장소와 시간 불문하고 들을 수 있도록 동영상 교육을 듣고 관련된 퀴즈를 푸는 방식이 많다. 퀴즈에서 일정 점수 이상 받으면 IRB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사실 교육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아예 동영상을 허투루 들으면 풀기 힘든 문제들도 더러 있다. 내 경우에는 영어로 들어야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교육을 다 듣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고, 그 자격을 받은 후에야 서류 작성을 시작할 수 있었다.


IRB 서류는 각 학교의 IRB 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대개 한 달에 한 번이고 회의일로부터 최소 2-3주 전까지 제출해야만 심사 대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생각보다 일정 맞추기가 쉽지 않다. 가령 우리 학교의 경우 매월 16일에 회의가 열리는데 이 회의에서 심사를 받고자 한다면 해당 월 1일까지 서류를 제출해야만 한다. 5월 중순에 학기가 끝났으니 6월 1일까지는 신청서를 내야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말이 신청서지 연구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다 확정해서 제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6월 회의를 놓쳤으니 다음 기회는 이번 달 7월 회의였고 그 말은 곧 7월 1일까지 신청서를 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이번 회의는 다행히 타이밍에 맞춰 서류를 낼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IRB 위원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로 엄격했었나 지나간 기억을 되살려 보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정해야 할 부분을 한 번에 주르륵 알려주면 참 좋을 텐데, 하나 고치고 와 됐다! 하면 바로 다음날 또 다른 거 고치라고 하고, 그걸 고치고 나면 이번엔 또 다른 거를 고치라며 계속해서 검토 요청이 왔다. 덕분에 7월 1일 제출된 내 신청서는 아직도 계류 중... -_- 방금 세 번째로 수정한 다음 재 제출 버튼을 누르고 달력을 보니, 세상에 내가 이걸 3주째 고치고 있었구나 싶어 한숨이 푹 나왔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IRB 승인은 물론이고 최소 파일럿 테스트는 돌렸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학술대회에 제출할 초록을 작성하고 있었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이번 달 안에 IRB 승인만 받아도 다행일 판이다. 이번 달에 마감되는 학술대회가 두 군데 있었는데, 파일럿조차 돌리지 못했으니 그 두 곳은 물 건너갔다 봐야 한다. 속상한 마음에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 구시렁거렸더니 그 말을 들은 선배가 한 마디 한다. "그럼 계획을 바꾸면 되겠네~"


언젠가 유퀴즈에서 유재석 자기님이 자신은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다고,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에 묶여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 했던 게 기억난다. 아마도 그건 본인이 생각 없이 막 산다는 뜻이 아니라, 늘 열심히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나도 재석님 마인드를 본받아야겠다. 계획을 세우긴 하되, 너무 거기에 매여서 살지는 않는 걸로.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계획대로 된 건 별로 없었지만 늘 그것이 내 계획과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2년 전 이맘때만 해도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코로나 시국은 또 말해 무엇하겠나. 제 아무리 야무지고 완벽한 사람들도 2년째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진 못했을 것이다.


며칠 전 읽었던 뉴욕타임스에서 시간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었다. 그 글의 저자에 따르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하지 않다나. 흔히 시간이 연속된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매시간은 별개의 시점이고 그 시간을 지나오는 우리들도 연결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가끔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내일의 나야, 부탁해'라는 말도 마냥 웃기기 위한 멘트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내가 최선을 다해 임하고 나면 내일의 나, 일주일 후의 나, 한 달 후의 나, 각각의 '나'들이 바통을 이어 이 연구를 잘 진행해줄 것을 믿어보련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케세라세라 (Que sera sera =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돼라)!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은 더 이상 자포자기의 고백이 아니라, 주어진 오늘 최대한 노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신감 어린 멘트인지도 모른다. 내일의 또 다른 나에게 맡겨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오늘을 살아낸 사람만이 당당하게 읖조릴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졸업은 하겠지! 오늘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고, 최대한의 보람과 기쁨과 열정을 순도 100%까지 속속들이 느끼고, 살아낼 수 있는 최대한을 살아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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