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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Sep 04. 2024

캠퍼스가 체질인 사람

저물어가는 개강 첫 주를 돌아보며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미국 대학은 여름방학이 길다 보니(5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약 3개월) 여름방학에는 보통 기숙사 방을 체크아웃하고 아예 짐을 뺐다가 개강과 함께 다시 체크인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방 안에 짐을 그대로 두면 사용료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3달치 기숙사 비면 한국 직항으로 다녀올 왕복 비행기 값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따라서 나의 경우도 첫 두 해는 그렇게 했는데, 그러려면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체크아웃하기 훨씬 전부터 미리미리 짐을 다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어야 하고, 출국일 전날이나 당일에는 기숙사 직원과 따로 약속도 정해서 창고 문을 열어 짐을 옮겨둘 일정도 잡아야 한다(창고 열쇠가 직원에게 있음). 방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에도 기숙사 복귀하자마자 창고에 있던 짐을 도로 다 빼서 방에 정리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3년 차 되던 해부터는 그냥 짐 그대로 다 두고 몸만 한국 갔다가 오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날에는 안 그래도 10시간 걸리는 장거리 비행으로 이미 힘든데 오자마자 짐 정리하느라 종일 보내고 나면 진이 빠져서, 이렇게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생긴 안 좋은 일로 인해 정신없이 보냈던 방학을 뒤로하고, 이번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실 고민과 걱정이 많았다. 화상 흉터 치료 중이다 보니 햇빛이 강한 하와이로 돌아오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공식적으로는 이번 학기가 내가 학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마지막 학기이다 보니 논문 쓰는 것을 이번 학기에 마무리할 수 없다면 아예 한국에서 지내며 논문을 다 쓰고 마지막 심사받을 때 재학생 등록을 하고 돌아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고민 끝에 하와이로 돌아온 것은, 일단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여름 내내 한국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집중이 쉽지 않아서였다. 한국에 있는 것과 미국에 있는 것은 일단 장점이 곧 단점인데, 한국에서 가족 곁에서 공부를 하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는 장점이 있는 동시에 하와이에서만큼 연구에만 집중하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주위에 회사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의 소식을 미국에서보다 더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여기서는 마치 식물원처럼 생긴 캠퍼스, 그것도 작은 내 연구실 안에서 연구 작업을 하다 보면 그런 현실적인 상황들에 대해 어느 정도 둔감해지거나 아예 잊고 살 때가 많은데, 한국에서 지낼 때는 그것들이 좀 더 피부에 와닿는 달까? 난 아직 졸업도 못했고 졸업 후에 자리를 잡는 것도 요즘 같은 불황에는 곧바로 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이미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고 직장에서 잘 나가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조급해지고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인문학의 특성상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연구 주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당장 때려치우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는 위기감도 가끔 든다. 아직 나는 논문 마지막 챕터를 한창 지도교수님과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행여 이번 학기 휴학을 하고 한국에서 줌으로만 논문 심사 커미티들과 소통하다 보면 자칫 의욕을 잃어버리고 이대로 수료생으로 남게 되는 게 아닐까 염려되기도 했다.


돌아오고 나서 첫 주가 지난 소감은 '그래도 역시 돌아오길 잘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캠퍼스 체질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국에서 있는 여름 내내 초여름에 벌어진 사고로 인해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흉터가 어느 정도 연해져서 매일 같이 보는 내 얼굴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는 덕분도 있고(아마도 이 이유가 가장 크겠지), 학생들로 북적북적한 캠퍼스를 걷다 보면 나까지 에너지가 샘솟는 게 느껴진다. 해야 할 일들은 많고 12월에 심사를 받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현실화하려면 사실 앞길이 구만리이지만, 어쨌든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 하여금 다시 우울했던 지난여름을 잊고 '공부 모드'로 재부팅시켜주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여배우가 '나 혼자 산다' 예능에 나와서 '배우란 직업이 일이 없을 때는 굉장히 우울하고 루즈해지기 쉬운 직업이라는 게 단점'이라 말해서 그게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이번 여름에 내가 학업에 의욕을 잃고 침잠해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것 같다. 나는 당장 해야 할 연구가 있고 소통해야 할 학생들과 동료들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개강과 동시에 크고 작은 스트레스와 유쾌하지 않은 일들도 더러 있었던 지난 한 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소소한 짜증들을 덮을 만큼, 새 학기의 기운 넘치는, 상쾌한, 들뜬, 이 기분은 캠퍼스 밖의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오직 캠퍼스에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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