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처음 떠난 여행(2)
내가 너의 처음을 함께 하고 싶었어
아이가 나와 어색해지는 동안 할머니, 아빠와의 관계는 두터워져 갔다.
아빠가 화장실에 가기만 해도 아이는 나를 뒤로 하고 문 앞에 달라붙어 아빠가 나올 때까지 울었다. 나는 우는 아이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아이가 그렇게 울 때 안아줬어야 했다. 나 자신도 아이와 내가 가까워지는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는 책을 읽고 싶을 때면 자기가 고른 책을 들고 아빠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내가 책을 들고 다가가면 아빠나 할머니를 찾아갔다. 아빠나 할머니는 웃었다.
아빠나 할머니 품에 안긴 아기에게 엄마에게 와 보라며 손과 팔을 펼쳐 보이면,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아빠나 할머니 품에 더욱 깊숙이 안겼다. 아빠나 할머니는 즐겁게 웃었다.
나는 즐겁지 않았다. 재미없었다. 아이는 같이 살아도 그리운 이가 되었다. 같이 살아도 대하기 어렵고 친하지 않은 이가 되었다.
어쩌다 아이가 나와 노는 데에 재미를 느끼는 날이 있었다. 나와 시작한 놀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 손을 붙잡고 더 놀자는 신호를 보냈다. 어머님께서 말리셨다. '내가 돌보마, 어서 가서 밥 먹으렴.' 때때로 어떤 끼니는 아이와의 놀이 앞에서는 미뤄도 된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어머님의 만류를 사양했다. 그런데 시댁에서 내 끼니는 어째서인지 누구의 끼니보다 우선이었다. 고작 밥 때문에 아이와 노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아까운 일인데, 왜 그토록 밥을 먼저 먹어야 했던가. 등을 떠밀려 밥상 앞에 앉았다. 대화의 온화한 분위기를 깰 수 없어서, '전 밥이 급하지 않아요. 아이와 놀고먹을게요.'라고 몇 번이라도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그때 나는 말 잘 듣고 밥 잘 먹고 아이는 영 못 돌보는 며느리로 사느라 아이의 손을 놓았다. 미친년.
양육의 모든 면에서 아빠나 할머니가 앞서고 엄마인 내가 뒤서는 일상에 나는 불만을 가졌다. 맞벌이 부부인 아들 내외와 손주를 돌보시는 어머님의 수고에 감사해야 하는데 자꾸 불만을 가지고 기분 나빠하고 질투를 한다는 생각에 자책을 많이 했다. 감정이 그치지 않아서 고민도, 자괴감도, 무력감도, 괴리감도, 가식도, 불안도 깊어졌다.
야근을 하는 날이면 내 삶을 저주했다. 녹초가 되어 퇴근하면 잠든 아기의 얼굴만 볼 수 있거나, 그마저도 깨울까 봐 못 보기도 했다. 그런 날은 가방에 소주를 한 병 넣고 귀가했다. 좋은 직장인,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죽지 못해 출근하는 직장인, 자궁만 제공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엄마, 안 하는 엄마.
매일 엄마이되 엄마가 아닌 날을 살다가 아주 드문 기회로 남편 없이 친정에 가면 짧게 '엄마 체험'을 했다. 친정에서는 내가 내 아이를 돌볼 수 있었고 아이에 대한 것들을 내가 결정할 수 있었다. 분유를 몇 시에 먹일 것인가, 와 같은 사소한 것들이라도 말이다. 친정 엄마가 아이를 돌봐 주셔도 아이가 내 아이라는 전제 하에서 도와주시는 터라 어떤 상황이 되어도 마음에 꺼림이 생기지 않았다. 엄마가 어머님만큼 아이를 세심하게 돌보고 배려하진 않으셨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로 하여금 아이를 돕게 했다. 그것이 엄마가 할 일이니까. 친정에서는 비록 서툴지만 내가 아이의 매 응가를 씻겨 주고, 목욕을 시켜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놀아 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엄마가 할 일이니까.
그때 아이는, 낯선 곳에서 그나마 익숙한 나에게 의지했고, 나는 그 상황이 피안의 세계에 온 듯 좋았다.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미역을 만지고 논 날, 휴지를 만지며 논 날, 배밀이를 한 날, 일어난 날, 혼자서 앉게 된 날에 내가 없었다. 아이가 첫 쌀미음을 먹은 날, 나는 일찍 퇴근한 날이었는데, 그럼에도 아이는 이미, 아빠와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생 첫 쌀미음을 맛본 뒤였다. 그날 나의 실망을 아무도 몰랐다. 아이의 첫 이유식이 중요하지, 엄마가 그 순간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든지 말든지 그게 대수이겠는가? 그래도 나는 실망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줘서 외로웠다.
아이가 태어나고 2년이 넘도록-그러니 제법 오랫동안-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단둘이 무엇을 하거나 어디를 간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외국어처럼 낯선 것이 되어 있었다.
'너랑 애랑 단둘이? 괜찮겠어?'
친구들은 나와 만날 때마다 물었어. '그런데 애는? 괜찮아?'
나는 웃으며 답하곤 했다. '나랑 애랑 나오는 게 더 어색해. 애 아빠가 잘 돌봐.'
그러면 대화는 다정한 내 남편 칭찬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러웠다. 내가 느끼는 괴리감은 습자지처럼 얄팍했다.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어느 날 친정에 기차 장난감이 생겼다. 놀잇감이 없어 손주가 심심해하는 걸 걱정한 엄마가 사둔 것이다. 아이는 건전지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차를 보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 얘는 열차의 개념이 없지? 모르는 걸 처음 봤으니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것도 아예 모르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 그대로, 기차를 본 적 없는 아이는 트랙을 따라 달리는 기차를 그냥 구경만 할 뿐이었고, 트랙에 붙어있는 단추를 누르며 빛과 소리를 더 즐겼다. 언젠가는 기차를 보여 주리라, 생각했다.
몇 달 후, 여동생이 감정적으로 지친 나를 알아채고 바람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행선지는 강릉. 대전에서 제천까지 기차를 타고, 제천부터 강릉까지는 동생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 여행에 첫째를 데려가기로 했다. 아이가 28개월이 되어서야 단둘이 여행을 떠나 본다.
생각보다 가족들이 걱정스러워하지 않았다. 첫째의 육아를 두고 갈등하던 때라 남편은 선뜻 그러라고 했고, 시부모님도 의외로 별말씀 않으셨다. 잘 다녀오라는 말씀뿐.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녀도 되는 거였구나. 나는 왜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게 나만 느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조금 황당하게 계획을 세워 아들과 기차여행을 떠났다. 생각보다 아이는 내 말을 잘 따랐다. 캐리어 위에 앉히고 손잡이를 끌면 제법 균형을 잡고 캐리어를 탄 채 얌전히 있었다. 매점에서 산 홈런볼을 기차 안에서 주었더니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기차에 올라탈 때는 제 다리로는 조금 높을 텐데도 계단을 혼자 씩씩하게 올랐고, 객차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눈치껏 알아채고 나보다 앞서 객차로 들어섰다. 대전에서 기차가 출발할 때에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깥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역을 몇 개 지나도록 아이는 밖을 구경했다. 나는 아이의 머릿속에 기차가 처음으로 자리 잡는 순간을 함께했다. 창 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뒤통수, 옆얼굴을 나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천에서부터 강릉까지 차를 타고 가는 길, 아이는 조용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자거나, 우리들이 대화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몰라도 창밖을 보며 차분히 앉아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질 때도 있었지만 그게 아이답다. 식당에서는 돌아다니거나 음식을 먹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울어 난처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외출하면 식당, 카페, 병원 등을 돌아다니곤 해서 고치고 싶었다. 나는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할 때 엄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안아 달래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준 채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 숙소에서는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빵을 나누어 먹고, 아이가 먹고 싶은 물을 챙겨주었다.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부담감과, 아이를 내 마음대로 돌봐도 된다는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에 얽매여 지내야 하지만, 그렇게 얽매여서 자유로웠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바다를 보고, 원하던 대로 바다를 산책하면서 나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때서야 아이의 무게가 실감되었다. 아이가 마음 놓고 안기고자 하는 유일한 품인 상태로 바다를 산책하면서 깨달았다. 이렇게 오래 아이를 안아본 적이 몹시 드물었다는 것을, 아이가 두 돌이 넘도록 크는 이 시간 동안, 아이 아빠와 아이 할머니의 품과 등이 아이에게 안식을 주었는데, 내 품과 등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아이를 안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아이를 안을 생각을 하는 방법을 몰랐다. 언제든 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 있었다.